
15일 정치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은 3차 상법 개정안을 다음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안건으로 올리기로 했다.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를 담은 1차 개정안과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주요 내용인 2차 개정안은 각각 지난해 7월과 8월 본회의를 통과했다. 여당이 3차 개정안과 관련해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필요하다”고 밝힌 만큼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배임죄 폐지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경영 판단에 대한 형사 리스크를 줄이려면 배임죄를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당정, 대체입법 마련 늦장…경영계 "사법 리스크 쓰나미"
지난해 9월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태스크포스’ 당정 협의에서 나온 발언이다. 정부·여당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안에 대한 보완책으로 ‘배임죄 폐지’ 또는 ‘전면 개선’을 약속했다. 기업 이사회의 정상적인 경영 판단에도 일부 주주가 ‘묻지마 배임 소송’을 남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보완책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15일 정치권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은 배임죄 폐지 계획과 관련해 대체입법안 초안도 마련하지 못했다. 1953년 제정된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회사에 손해를 가했을 때’ 처벌하는 형벌로, 모호한 조항과 검찰의 무분별한 기소 탓에 지난 70년간 기업인을 옥죄는 ‘족쇄’로 작용했다.
일반 배임죄와 이보다 가중 처벌되는 업무상 배임죄는 형법에 명시돼 있고, 상법에는 이와 별도로 회사 발기인과 이사, 임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배임죄가 있다. 여기에 특정경제가중처벌법 3조에는 배임죄 가중 조항도 담겨 있다. 세계에 유례없는 촘촘한 처벌 조항이다.
배임죄 폐지 논의 초기에는 상법상 배임죄를 먼저 폐지한 뒤 경영 판단 원칙을 형법상 배임죄에 반영하는 작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다 여당이 갑자기 상법·형법상 모든 배임죄를 폐지하고, 30여 개 개별법에 대체 조문을 넣거나 이를 포괄하는 하나의 특별법을 만드는 통합 처리 방안을 들고나왔다. 이게 패착이 됐다. 30여 개의 여러 법을 한꺼번에 개정하려다 보니 입법 속도가 현저히 떨어진 것이다.
이러는 사이 1·2차 상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었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을 담은 상법 3차 개정 논의도 다음주부터 본격 논의된다.
이해 당사자가 아니어도 배임죄로 고발할 수 있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남소’를 부르기 때문이다. 일단 고발되면 검찰이 수사하기 때문에 기소 건수도 많다. 법 위반 요건 중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의 모호함 때문에 법원의 자의적 판단 가능성도 크다. 한 로스쿨 교수는 “배임죄의 ‘임무 위배’와 ‘재산상 손해’라는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법원 판단이 달라지곤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점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2014~2023년 배임 기소 건수는 연평균 965건으로 일본(31건)의 30배가 넘는다. 하지만 무죄율은 6.7%로 전체 형사범죄(3.2%)보다 두 배 이상이다. 이런 이유로 배임죄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검찰의 무리한 배임죄 기소로 수사를 받았지만 3~4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산업계는 “정치 문제로 배임죄 폐지를 실기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정치권의 관심이 6월 지방선거로 쏠린 만큼 배임죄 폐지 논의가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산업계는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 여럿 담긴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 상황에서 배임죄 폐지가 실현되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큰 비용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 속도가 느려지고 판단이 소극적으로 진행돼 경제 성장동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향후 배임죄 폐지에 따른 대체입법안을 만들 경우 적용 요건을 목적범, 침해범으로 한정하고, 경영판단원칙을 명문화하는 방안을 포함해야 할 것으로 분석된다. 경영판단원칙은 이사가 절차를 준수해 합리적 근거에 기반한 의사결정을 하면 그 결과 손해가 발생해도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하는 것이다.
황정수/이시은/박의명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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