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생각하는 정의와 법의 정의는 왜 다를까요. '정희원의 판례 A/S'에선 언뜻 보면 이상한 판결의 법리와 배경을 친절히 설명해드립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으로 발생한 손실을 배상하라며 국내외 담배회사들을 상대로 낸 533억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에서 2심에서 법원이 담배회사 손을 또다시 들어주며 각계에서는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폐암의 가장 큰 발병 요인이 흡연이라는 건 명확한 '과학적 사실'인데 법원이 어쩌면 생뚱맞게 "관계가 없다"고 재차 판결했기 때문입니다.
서울고등법원 제6민사부(부장판사 박해빈·권순민·이경훈)는 지난 15일 건보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BAT)코리아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공단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이번 판결에 대해 특히 의료계 반발이 거셉니다. 호흡기내과 전문의이기도 한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법원이 아직도 이렇게 유보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비통한 일"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의료계에서도 "과학자가 확인한 의학적 결과를 법이 무시했다"는 식의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도 담배가 과학적으로 몸에 나쁘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냥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습니다. 차이는 과학과 법의 논리 구성 방법에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다를 수 있는 '법적 사실'
과학은 망원경과 같아 무언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집단 전체의 통계적 경향을 봅니다. 흡연자 집단의 폐암이 발병할 확률이 비흡연자 집단보다 20배 높다는 사실이 숫자로 입증되면 흡연과 폐암 발병에 인과관계가 성립합니다. 누적된 데이터로 흡연이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게 '과학적 사실'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이러한 관측 방법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와 통계자료들이 흡연과 "폐암과 같은 암 발병과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규정하고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하지만 법은 현미경과 같아 개별적 사실 관계를 세밀하게 들여다봅니다. 폐암의 발병 원인에 유전적 요인, 스트레스, 대기오염, 직업적 환경 등 다양한 요소가 없었는지 살핍니다. 개인의 폐암 발병의 원인이 담배만으로 한정지을 수 있는지 면밀하게 보는거죠.
이러한 법원의 고민은 담배회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담배소송 관련 판결문에도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역학적 연구 결과는 통계적 차원에서 집단 내 질병 발생의 분포 및 결정 요인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만 특정 개인의 질병에 대한 개별적인 원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아무리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가 여러 선행연구를 통해 과학적 사실로 인정됐다고 하더라도 개별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를 수 있어 추정에 따른 '일반화의 오류'를 법정에서 섣불리 범할 수 없다는 겁니다.

법원은 어떤 사실에 대해 추정해서는 안 되는 기관입니다. 추정만으로 법원이 무언가에 책임이 있다고 보면 '잠재적 위협'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소송이 이어지며 사회 질서를 지켜야할 법이 되려 사회 전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일례로 담배 소송에서 만약 건강보험공단이 최종 승소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술, 설탕 가공육 등 과학적으로 유해한 게 사실인 기호식품 제조 기업들이 줄소송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법이 과학과 달리 인과관계를 추정한 내용을 모든 개인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법원이 인정하는 수준의 인과관계 증명되려면 개인이 30년 전부터 피운 담배가 내 몸속 세포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의학적으로 100% 증명해야 하는데 현재 과학의 수준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담배가 술과 같은 '기호식품'이라는 점도 담배회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건보공단은 담배에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안전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이 이를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담배의 제조업자가 자신이 제조한 담배가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칼이 위험하다고 해서 누군가가 칼을 쓰며 다쳤을 때 칼 제조업체에 책임을 묻지 않는 것과 유사한 법적 논리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랜 기간 동안 담배의 유해성을 사람들이 인식해왔던 점 또한 법원이 담배회사들에 폐암 환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재판부는 "피고들이(담배회사)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담배의 유해성을 안내하는 내용의 신문 기사 약 400건을 제출했다"며 "내용을 살펴보면 오래전부터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경고해 온 사정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흡연에 대한 인식 시대 따라 달라져"...이례적 의견 밝힌 재판부
하지만 담배회사들에 손해배상 의무가 없다고 청구한 이번 재판부도 담배회사들의 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벌어질 사회적 논란을 의식하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 말미에 “소송 당사자들과 관계자 여러분의 그간 노력과 열정에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며 “우리 사회의 흡연에 대한 인식과 대처는 시대 상황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정책과 기준이 수립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자칫 의견으로 비칠 수 있는 이러한 형태의 발언은 재판부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판결을 내릴 때마다 이례적으로 나오곤 합니다. 건보공단이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인 만큼 사건은 한 번 더 법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법조계에서는 증명 내용과 방식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1·2심 재판부의 법리가 탄탄한 만큼 판결의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법정 다툼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재판부가 이번 판결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분쟁을 통해 '사회의 흡연에 대한 인식과 대처'는 지속해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희원 기자 toph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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