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1월 16일 14:41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거래소가 조만간 내놓을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놓고 시장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상장사 자회사의 증시 입성이 무차별적으로 제한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시선이 많다.
하지만 거래소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란 걱정도 나온다. 시장에선 거래소가 가이드라인에서 중복상장의 기준과 모회사 소액주주 보상 방안 등을 최대한 구체화해 협상의 물꼬를 틔워야 한다는 요구가 일고 있다.
16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마련 작업에 착수했다. 가이드라인의 초안이 마련되면 업계 의견 수렴과 금융위원회 등 당국과의 협의를 거쳐 1분기 중 세칙 개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거래소가 가이드라인 작성에 나선 것은 중복상장의 개념이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과거 중복상장은 물적분할 후 상장하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을 일컫는 개념으로 활용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모든 상장사의 계열사 상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물적분할이 아니라 인수합병(M&A) 기업이나 신설법인을 상장하는 사례도 무차별적으로 도마에 올랐다.
거래소는 가이드라인에서 중복상장의 개념과 유형 등을 제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어떤 사례가 중복상장에 해당해 기존 상장사 주주들에게 보상을 마련해야 하는지 명문화하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거래소가 최근 예비심사 과정에서 언급한 사항들이 담길 것으로 보고 있다. 거래소는 상장 예비심사 때 모회사와 자회사의 업종 유사성, 매출 의존도 등을 중복상장을 심사하는 기준으로 활용해 왔다.
가령 거래소는 코스닥시장 상장사 케이피에프 자회사 티엠씨의 상장을 예비 심사할 때 모회사 주주환원책을 심사 잣대로 삼았다. 티엠씨는 케이피에프 소액주주에 대한 티엠씨 주식 현물배당, 케이피에프의 자기주식 취득 및 소각, 배당성향 상향 등을 내세워 심사를 통과했다.
반면 엘티씨의 자회사인 엘에스이는 모회사의 매출 의존도에 발목을 잡혀 상장을 철회했다. 거래소는 엘티씨가 적자를 내는 가운데 엘에스이만 높은 순이익을 내고 있어, 엘이스이를 상장시키면 시장에서 엘티씨 주식 가치가 크게 떨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IB업계에서는 거래소의 가이드라인 제정 시도를 놓고 일단 기대감이 나온다. 그동안 중복상장 여부는 개별 사례별 판단에 의존해 왔고, 기업들은 예비심사 단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상장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가이드라인이 마련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자회사 상장 추진 과정에서 요구될 조건과 보완책을 사전에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상장 가능성에 대한 예측력이 높아지면서 자금 조달 전략의 불확실성도 줄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거래소가 가이드라인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을 우려한다. 중복상장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원칙론 수준에 그치게 제시하거나, 최종 판단을 100% 정성적 심사에 맡길 경우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령 거래소가 모든 상장사의 계열사 상장을 중복상장으로 규정할 경우 면밀한 심사 대상이 되는 사례가 더 늘어날 수 있다. '모회사의 기업가치가 훼손될 우려가 나오는 경우' 등으로 모호하게 적시될 가능성도 있다. 업계에서는 중복상장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명쾌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장에서는 거래소가 중복상장 심사 과정에서 소액주주 동의 절차를 사실상 필수 요건으로 설정할 가능성도 주시하고 있다. IB업계에서는 소액주주 동의가 자칫 ‘거부권’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한다. 일부 주주가 반대에 나설 경우 상장 추진 자체가 장기간 표류하거나 무산될 수 있어서다.
에식스솔루션즈 상장을 둘러싸고 ㈜LS 주주 반발이 거세진 점도 이러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에식스솔루션즈는 ㈜LS의 증손자회사다. LS그룹이 지난 2008년 인수했다.
㈜LS는 주주들에게 에식스솔루션즈 신주 인수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LS 주주들 사이에선 "유상증자 참여를 통해 돈을 내고 먼저 살 기회를 주는 것을 주주환원책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일찌감치 나오고 있다.
시장에서는 거래소가 가이드라인에서 모회사 소액주주 보호 방안을 선제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단순히 ‘주주 가치 훼손 우려가 해소돼야 한다’는 선언적 문구에 그치지 않고 상장 주식 현물배당, 자사주 취득·소각, 배당정책 강화 등 실질적인 보상 수단과 그 정도를 예시로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이 기업과 주주 간 협상을 촉진하는 기준선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복상장을 원천적으로 막기보다는 주주가치 훼손 가능성이 큰 구조에 대해서는 사례를 들어 보완책을 요구하는 방향이 거론된다. 이 경우 주주환원책이 합당한지 여부를 객관적인 차원에서 검증할 수 있게 된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중복상장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먼저 명확히 제시하고, 가능한 경우에는 어떤 수준의 주주 보호 장치가 요구되는지를 구체화해야 한다”며 “그래야 기업도 준비할 수 있고, 주주와의 협상도 소모적인 갈등이 아닌 제도 틀 안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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