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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으론 도저히 감당 안돼"…결국 유럽서 짐싸는 기업들 [강경주의 테크X]

입력 2026-01-19 09:00   수정 2026-01-19 09:12


"높은 에너지 가격과 과도한 규제 때문에 기업들이 유럽을 떠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4대 연구기관인 네덜란드국립응용과학연구기구(TNO)의 차크 친아소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산업화'와 혁신 저해의 원인으로 유럽연합(EU) 특유의 '컴플라이언스 문화'를 지목했다. 컴플라이언스는 법령·규정·윤리 기준을 준수하도록 EU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통제 시스템을 의미한다. 그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전력 수요가 폭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에너지 대전환을 위해 한-네덜란드 양국의 장점을 모아 협력하면 '윈윈'할 수 있다고 손을 내밀었다.
병목 현상 신음하는 유럽…가장 심한 건 에너지
친아소이 CEO는 유럽의 각종 규제가 '병목 현상'을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규제 때문에 도로도 막히고, 주택·학교 건설, 각종 인허가 등 모든 것이 막혔다"며 "가장 심각한 건 '에너지'"라고 꼽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AI 전환 등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에너지 주권 문제가 불거졌지만 현 전력 수급 계획으론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의 에너지 기업들은 더딘 인허가 절차와 과도한 규제를 피해 미국 시장으로 대거 이동 중이다.

실제 지난해 11월 이탈리아의 소형모듈원자로(SMR) 스타트업 뉴클레오가 영국에서 추진하던 160억 유로 규모 SMR 20기의 건설을 미국에서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스테파노 부오노 뉴클레오 CEO가 11월 파리에서 열린 세계원자력전시회(WNE)에서 "미국에는 투자를 장려하는 많은 수단이 있지만 유럽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은 것이다. 네덜란드의 SMR 스타트업인 토리존의 산더 더그루트 최고기술책임자(CTO)도 "유럽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원전 연료 업체인 오라노와 우렌코도 유럽 대신 미국에 새로운 농축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보리스 슈흐트 우렌코 CEO는 "미국이 우리의 생산능력 확대 프로그램에 장기 계약으로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우렌코는 미국 뉴멕시코에 연간 약 430만t의 우라늄을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 중이며, 2027년까지 70만t의 생산능력을 단계적으로 추가할 예정이다.

뒤늦게 에너지 자립 문제에 직면한 유럽에선 잇따른 원전 기업 이탈에 당황스러운 모습이 역력하다. 현지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원전 규제 완화 행정명령이 유럽 에너지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인 동력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친아소이 CEO는 "유럽의 인허가는 보통 미국보다 2~3배 더 오래 걸린다"며 "미국의 규제 완화와 적극적인 투자 환경이 유럽 기업들을 미국으로 이전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속도 조절 들어간 해상 풍력 발전
풍력 발전에 대한 유럽 내 인식 변화도 감지된다.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북해 중앙부 '도거뱅크' 해역은 1년 내내 바람이 불어 글로벌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완공되면 약 3.6GW의 발전용량을 기록할 예정이지만 2024년 5월 도거뱅크에서 시운전중 블레이드(날개)에서 고장이 발생하면서 분위기가 바꼈다. 풍력 발전의 초대형화로 인해 거대한 블레이드가 잦은 고장이 발생할 수 있는 데다 수리와 유지 보수, 재사용이 힘들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델프트 공대의 한 교수는 "초대형 해상 풍력 인근의 기류 변화로 인한 이상 기후 문제, 바다에서 생산된 전기의 누전과 풍력 소음으로 인한 해양 생태계 영향까지 불거지며 풍력 발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싹트는 중"이라고 전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40년까지 해상 풍력 설치 용량을 50GW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최근 목표치를 30GW로 낮추는 조정안을 발표했다. 해상 풍력 건설 비용 상승, 기상 조건에 의한 전력 수급 불안정, 고사 직전의 원전 생태계 육성 등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한 결정이다. 네덜란드의 풍력 산업도 속도 조절에 나선 모습이다. 2024년 네덜란드의 풍력 발전기의 수입과 수출은 각각 전년대비 99.5%, 53.9% 감소한 244만 달러와 2928만6000달러를 기록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지난해 50여 년 만에 원자력 에너지 용량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에너지 안보 이슈와 AI 개발 수요가 부각되면서 재생에너지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엿보인 정책 전환이다. 네덜란드의 원전은 1973년 제일란트주 보르셀에 지은 활성 원자력 발전소 1기 뿐이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원자력 에너지는 네덜란드 총 에너지 발전량의 1~4%에 불과해 유럽 주요국 중 가장 낮다. 네덜란드는 2050년까지 발전용량 1000~1650메가와트(㎿) 규모의 원전 최대 4기를 추가로 건설해 2050년에는 전체 전력 생산량의 15%를 원자력이 담당하게 한다는 계획이다.

신규원전 4기 건설 정부 예산도 기존 45억 유로에서 지난해 140억 유로로 늘렸다. 소피 헤르만스 네덜란드 기후녹색성장부 장관은 지난해 2월 의회 서한을 통해 신규 원전 건설을 위해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과 운영 준비, 건설계약 체결, 발전소 운영 등의 역할을 할 지주사 설립 계획을 공유했다. 그는 "보르셀 원전 운영사 EPZ의 지분 인수도 논의중"이라며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친아소이 CEO는 "원자력은 가장 강력한 에너지 기술"이라며 "한·네덜란드가 공동으로 국가 전략급 원전 기술 로드맵을 설계하는 수준의 협력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선 협력 시작됐다. 네덜란드 기후녹색성장부 관계자와 기업, 연구·교육기관 등을 포함한 원자력 부문의 주요 인사들로 구성된 사절단이 2024년 12월 방한했다. 사절단은 한국원자력연구원, KAIST, 서울대, 한국전력 국제원자력대학원대학, 두산에너빌리티, 현대E&C,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을 방문해 협력을 논의했다. 나오미 베르스트라텐 브레인포트 CEO는 "AI는 에너지 수요를 폭증시키고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도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급 방식을 고민 중"이라며 "비전이 맞는 양국이 에너지 분야도 협력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덴하그·에인트호번=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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