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지경이 돼서도 화장을 고치다니…. 정말 못 말리는 여자야.’
1764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침실. 죽어가는 그녀가 화장품을 집어 들었습니다. 폐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도 색조 화장품으로 얼굴에 옅은 생기를 덧칠하는 그 손길을 보며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사치에 미친 여자라더니, 죽기 직전까지 저러네.’
하지만 사실 그녀의 행동은 허영이나 아름다움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절벽 끝에서, 잠시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화장은 살아남기 위해 몸에 밴 습관이자 업무 루틴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화려한 궁정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렸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1721~1764). 누군가는 왕의 애첩으로 권력과 부(富)를 거머쥔 그녀를 ‘세상을 다 가진 여자’라 불렀습니다. 반면 뒤에서 그녀를 ‘무능과 탐욕의 대명사’라 욕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하지만 둘 다 그녀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화려하게 정원을 사뿐사뿐 걷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삶은, 사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질주에 가까웠거든요.
부딪혀 부서지지 않으려면 계속 달려갈 수밖에 없는 삶. 유럽 역사를 뒤흔든 ‘왕의 여자’는 매일 그렇게 힘겨운 하루를 살아냈습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궁정 생활,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평민 출신의 아홉살 소녀 잔 앙투아네트(훗날의 퐁파두르 부인)는 어머니와 함께 찾아간 점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건 그 예언에서 시작됐습니다.
소녀는 부르주아 계층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생활은 늘 여유로웠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늘 생각했습니다. ‘아, 재미없어.’
그럴 만도 했습니다. 남존여비의 신분제 계급사회였던 당시 프랑스에서 평민 여성으로 태어난 그녀의 미래는 그야말로 뻔했거든요. 만약 운이 좋다면 소녀는 훗날 적당한 하급 귀족에게 시집을 가서, 아이들을 낳고, 적당히 여유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겁니다. 썩 괜찮은 삶. 하지만 그건 소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재미있는 일,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듣게 된 ‘왕의 여자’라는 예언은 신의 계시처럼 느껴졌습니다. 옆에서 듣던 어머니도 생각은 비슷했습니다. ‘이 아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소녀는 똑똑했고, 어머니를 닮아 미모도 빼어났으니까요. 그렇게 소녀는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영재 교육’을 받게 됩니다.
부모는 소녀를 왕의 애인 후보로 키우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쏟아부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성악가, 작가 등 각 분야 최고 수준의 ‘1타 강사’들을 과외 선생님으로 삼는 건 기본. 노래와 춤은 물론 연기, 악기 연주, 그림, 보석 세공, 심지어 식물학까지 공부시켰습니다. 왕의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는 똑똑한 여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훈련은 아이돌 연습생 생활만큼이나 혹독했습니다. ‘평민티’를 내지 않기 위해 귀족들만 쓰는 단어와 표현을 배우고 복잡한 귀족 족보와 가구 양식을 외웠습니다. 예법은 상대방의 지위에 따라 고개를 다르게 숙일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숙달했습니다. 치맛자락 아래에 마치 바퀴가 달린 것처럼 스르륵 걷는 궁정 여인들의 ‘슬라이딩 스텝’도 익혔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기를 10여 년. 스물두 살이 되던 해, 퐁파두르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왕이 근처 숲으로 사냥을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가장 먼저 그녀가 한 일은 왕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것. 그런 뒤 그녀는 왕의 눈에 띄기 위해 그 근처를 맴돕니다. 하루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파란색 마차를 몬 채 옆을 지나갔다가, 그다음 날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분홍색 마차를 모는 식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 그런 식으로 주위를 맴도니 왕도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아름다운 요정은 누구인가?” 그렇게 퐁파두르는 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년 뒤, 궁전에서 열린 대규모 가장무도회. 다이애나 여신의 의상을 입은 그녀 앞에 괴상한 나무 분장을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멀리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으니까요.



그리고 왕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습니다. 자신의 공식 애인(총희)으로 삼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게 퐁파두르는, 마침내 ‘왕의 여자’가 되는 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베르사유 최고의 ‘공연 기획자’가 됐습니다. 왕 한 사람만을 위한 작은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 겁니다. 그녀는 예산을 짜고, 귀족들을 배우로 섭외하고, 그들을 닦달해 대본을 외우게 하고, 연기를 지도했습니다. 때로는 그녀 자신이 직접 주연 배우로 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벌인 공연 횟수만 122회였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왕의 ‘비공식 비서실장’ 역할이었습니다. 왕이 우울증이나 피곤으로 정무를 돌보기 힘들 때면, 퐁파두르는 산더미 같은 국정 보고서를 미리 검토하고 요약해 왕에게 결재를 받았습니다. 외교 사절을 접견하고, 귀족들의 다툼을 조율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왕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늘 혹독한 다이어트를 해야 했습니다.
퐁파두르가 친구들에게 남긴 편지에는 거대한 압박감과 감정 노동의 피로가 역력히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사는 삶은 끔찍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은 1분도 없습니다. (중략) 내가 숨이라도 쉴 수 있을까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뤼첼부르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나의 삶은 영원한 전투입니다.”(뒤 오세 부인에게 보낸 편지) “이곳에 온 지 4년 만에 너무 많은 걸 봐서 20년은 늙어버린 것 같아. 혼자 있을 때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잊으려고 노력해.”(남동생에게 한 말)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혹사하며 노력했을까요. ‘힘들다면 그만두고 적당히 평범하게 살면 될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퐁파두르는 이미 국왕의 최측근이자 막대한 예산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프랑스의 실세. 여기서 물러난다는 건, 이때까지 일하며 척진 적들에게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마치 핸들이 고장 난 트럭을 운전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계속 질주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파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그녀를 향한 비방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인 그녀가 권력의 핵심에 있는 게 못마땅했던 귀족들은 그녀에게 온갖 독설과 허위 비방을 퍼부었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화려하게, 더 완벽하게 왕의 곁을 지켜야 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집니다. 왕이 자신을 버리기 전, 왕의 침실로 통하던 비밀 계단을 먼저 스스로 막아버린 겁니다. 대신 퐁파두르는 왕의 애인에서 벗어나 왕의 ‘비공식 수석 장관’이자 ‘영혼의 파트너’가 되려 했습니다.

여기에 걸맞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여러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프랑수아 부셰, 캉탱 드 라 투르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퐁파두르를 그렸습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그림의 디테일. 당시 여성의 초상화에는 장신구나 보석이 가득한 게 일반적이었지만, 퐁파두르의 그림에는 유독 책과 악보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나는 단순한 미녀 애인이 아니야. 나는 예술과 학문의 수호자고, 이 지성으로 당신 곁을 지킬 거야.’
실제로 그녀의 문화적 소양과 안목은 탁월했습니다. 퐁파두르는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독일의 ‘마이센’ 브랜드가 꽉 쥐고 있던 도자기 시장에서 프랑스의 도자기 브랜드 ‘세브르’를 키워낸 게 대표적입니다. 세브르의 성공은 그녀가 왕에게 직접 도자기 카탈로그를 들고 귀족들을 상대로 세일즈를 하게 시켰고, “프랑스 도자기를 사지 않는 건 애국심이 없는 것”이라며 강매에 가까운 마케팅을 펼친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키운 세브르 도자기는 유럽 각국 왕실에 선물로 들어가 프랑스를 ‘우아함과 사치의 중심지’로 각인시켰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훗날 프랑스 명품 산업의 발전에 적잖은 도움이 됐습니다.


계몽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인 볼테르 등 여러 지식인을 후원한 것도, 출판의 자유를 옹호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퐁파두르는 콩코르드 광장 설치를 비롯해 파리의 도시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판단이 늘 완벽했던 건 아닙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손잡고 벌인 프로이센(지금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한 원인 중 하나는 퐁파두르의 ‘인사 실패’였습니다. 군사적 역량은 따지지도 않고 그저 친하다는 이유로 지인을 사령관 자리에 ‘낙하산’으로 꽂아 넣었거든요. 그래도 왕은 그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764년, 42세의 퐁파두르는 폐병에 걸립니다. 죽음을 직감한 퐁파두르. 죽음이 마치 퇴근처럼 느껴져서였을까요. 그녀는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임종을 지키러 온 사제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 하자,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음을 띠며 농담을 했습니다. “잠시만요, 신부님. 내 영혼도 함께 나갑시다.”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베르사유에는 장대비가 쏟아졌습니다. 루이 15세는 궁전 테라스에 서서 멀어져 가는 그녀의 관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후작 부인이 여행을 떠나기에 참 나쁜 날씨군(La Marquise a bien mauvais temps pour son voyage).” 얼핏 들으면 차갑기 짝이 없는 말. 하지만 이는, 감정을 억누르도록 훈련받은 왕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에게 평생을 바친 퐁파두르가 그 말을 들었다면 행복했을까요. 어쩌면 퐁파두르의 삶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질주하는 수많은 현대인의 모습과 조금은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모습과 삶이 담긴 화려하고도 아련한 그림들을 보며, 잠시 멈춰 서서 나름대로 상상해 볼 뿐입니다.
<i>***이번 기사는 Nancy Mitford의 'Madame de Pompadour', Christine Pevitt Algrant의 'Madame de Pompadour: Mistress of France'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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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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