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빈 슈타츠오퍼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 Opera). 오페라 전문 성악가들에게 '메트'는 꿈의 무대로 통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극장이 유명해서가 아니다. 세계 정상급 가수들이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캐스팅 시스템, 한 시즌 내내 쉼 없이 돌아가는 초대형 레퍼토리 극장 운영, 그리고 한 번의 무대가 곧바로 세계 시장으로 확산하는 미디어·비평 네트워크가 한데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메트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오페라 한 편을 넘어, 자신의 이름이 곧 출연한 배역에 대한 ‘국제적 표준’으로 검증되는 순간에 가깝다.
더욱이, 세계 최고의 오페라 제작 시스템을 자랑하는 메트 무대에서 주역으로 노래한 한국 성악가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소프라노 홍혜경, 조수미, 신영옥, 박혜상, 박소영을 비롯해 테너 김재형, 김우경, 이용훈, 백석종과 바리톤 김기훈, 베이스 연광철 박종민 등 다양한 성부의 국가대표급 성악가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 데뷔를 통해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단 한 성부, 메조소프라노만큼은 오랫동안 영광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압도적인 성량과 깊은 저음을 앞세운 외국 여성 저음 가수들 사이에서 한국 메조소프라노가 좀처럼 명함을 내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내 그 벽이 무너졌다. 지난 9일 개막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스즈키 역으로 무대에 오른 메조소프라노 김효나가 한국 메조소프라노 최초로 메트에 데뷔했다. 그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커튼콜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을 회상했다.
▷메트 오페라 무대에 처음 올랐던 순간의 기억을 들려주세요.
“커튼이 열리고 관객석에서 함성과 박수가 들려오자 ‘아, 정말 메트 무대에서 노래했구나’ 싶었어요.
공연 중에는 무대 위에서 오로지 음악과 동선, 상대 배우와의 호흡에만 집중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첫 공연이 끝난 뒤에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어요.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일 두 번째 공연에 대한 긴장이 사라지고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김효나의 메트 데뷔는 화려한 콩쿠르 우승이나 단번의 스타 탄생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콩쿠르 우승으로 화려하게 이름을 알리는 대신 꾸준한 ‘경험치’가 쌓인 데뷔였다. 그는 자신을 두고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 온 느린 걸음의 성악가”라고 소개했다.

▷‘한국 메조소프라노 최초 메트 데뷔’라는 수식어를 얻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저는 한 방에 주목받는 반짝 가수는 아니었어요. '스즈키'라는 역할을 13개 이상의 프로덕션에서 100회 이상 노래했습니다. 독일 도르트문트,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 캐나다 토론토까지, 다른 극장에서 이 역할로 계속 무대에 서 왔어요, 한 역할을 여러 지휘자, 연출자들과 함께 꾸준히 하다 보니 저와 함께 공연한 연출자들로부터 ‘이 역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성악가’라 평가 받게 됐고, 어느 순간 메트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 역할로 여러 극장에서 꾸준히 노래해 온 점을 메트에서도 인정해 주신 것 같아요.”
김효나는 지난 시즌 LA 오페라와 캐네디안 오페라 컴퍼니에서 연이어 스즈키를 맡으며 배역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보수적인 메트의 캐스팅 관행 속에서 단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주역으로 데뷔했다는 점에서 이번 데뷔 무대는 더욱 의미가 크다.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 속 스즈키를 어떤 인물로 그려내셨나요?
“스즈키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관객을 대신해 울어주는 인물이에요. 핑커톤과 초초상의 결혼 장면에서는 함께 기뻐하고, 미국으로 떠난 핑커톤을 기다릴 때는 초초상과 함께 애를 태우죠.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됐을 때는 초초상을 대신해 흐느껴 웁니다. 저는 스즈키를 ‘관객의 감정을 무대 위로 전달하는 화자’라고 생각해요.”
안소니 민겔라가 연출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비부인> 프로덕션에서는 스즈키를 단순한 유모가 아니라 초초상과 대등한 관계의 ‘시스터십’ 인물로 설정했다.

▷ 초초상 역의 소프라노 아이린 페레스와의 호흡은 어땠습니까?
“이번 프로덕션은 스즈키와 초초상을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감정을 나누는 동반자로 그렸어요. 덕분에 아이린 페레즈와 무대 안팎에서 자연스럽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관계가 관객에게도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었어요. 특히 ‘꽃의 이중창’은 특별한 리허설 없이도 서로의 숨결을 읽으며 노래하는 순간, 다이내믹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어요.”
이번 <나비부인> 무대는 김효나 개인의 데뷔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 한국 성악계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김효나와 함께 테너 백석종(핑커톤 역), 바리톤 차정철(야마도리 왕자 역), 메트 오페라 코러스 단원 이주환(공증인 역)까지 네 명의 한국 성악가가 한 프로덕션에 이름을 올렸다.

▷ 한국 동료 성악가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경험은 어땠습니까?
“제게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감을 숨기려 노력하던 중인데 평소 친하게 지내 온 동생인 테너 백석종과 바리톤 차정철 선배가 다가와 '오늘 공연이 메트 데뷔 맞아요? 한참 전에 벌써 섰던 거 아니야?'라며 농담을 건네줬어요.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어요. 제 데뷔 무대에 한국 성악가가 네 명이나 함께 섰다는 사실 자체가 큰 힘이 됐고,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노래할 수 있었어요."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하기까지 도움이 된 특별한 인연을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이번 데뷔 무대에는 지휘자와의 인연도 큰 힘이 됐어요. 과거 메트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파이널 무대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지휘했던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마르코 아밀리아토가 이번 공연을 맡았거든요.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분인데, 성악가가 편하게 노래할 수 있도록 템포를 맞춰주는 스타일의 지휘자 덕분에 데뷔 무대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노래할 수 있었죠. 또 유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테너 니코 카스텔의 마스터클래스를 받았어요. 영어도, 노래도 자신이 없던 시절이었죠. 노래를 마치고 긴장된 마음으로 서 있던 저를 니코 선생님이 안아주시면서 '효나, 언젠가 메트 무대에서 만나자. 기다릴게'라고 하셨어요. 그 말은 제 인생 최고의 칭찬이자 목표가 됐요.”
김효나가 메트 무대를 마음에 품게 된 계기는 2006년 뉴욕 매네스 음대 유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천재적 언어 감각으로 9개 국어를 구사하며, 국제 음성기호(IPA)를 오페라 교육에 정착시킨 포르투갈 출신 성악가 니코 카스텔은 2014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격려는 20년 동안 김효나를 버티게 한 힘이 됐고, 그는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켰다.
▷ 메트 무대를 꿈꾸는 후배 성악가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으신가요?
“성악가는 긴 호흡으로 버텨야 합니다. 누구나 한번은 꺾이는 순간이 와요. 그때 그만두지 말고 버텨낼 맷집을 키우세요. 저는 콩쿠르로 반짝 빛나지 않았어요. 단역부터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죠. 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단단한 제가 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김효나의 메트 데뷔는 화려한 콩쿠르 우승으로 단번에 스타가 되는 서사와는 결이 다르다. 오랜 시간 무대에서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세계 무대에서 한국 여성 저음 성악가의 경쟁력을 입증한 사례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러한 성취가 국내에서도 합당한 평가와 존중을 받는 것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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