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주식시장의 고질적 병폐인 ‘복합기업(지주사) 할인’은 늘 투자자의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여러 사업부가 한 지붕 아래 섞여 있어 각 사업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지배구조의 불확실성이 주가를 짓누르는 현상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 대표 그룹 한화가 이 거대한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시장에서는 이를 단순한 구조 개편을 넘어 지배구조 혁신과 파격적 주주환원을 동시에 잡은 ‘밸류업’ 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한화 인적 분할 뭐길래
한화는 지난 1월 14일 이사회를 거쳐 대대적인 인적 분할과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장기 관점의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 사업’과 ‘민첩한 대응이 요구되는 기술·서비스 사업’의 분리다. 인적 분할은 기업을 분리할 때 신설 법인의 주식을 모회사 주주에게 같은 비율로 배분하는 분할 방식이다.
분할 후 존속 법인인 지주사 한화는 방산·우주항공(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 쎄트렉아이), 조선·해양(한화오션, 한화엔진), 에너지·케미칼(한화솔루션, 한화임팩트, 한화토탈에너지스), 그리고 금융(한화생명, 한화손해보험, 한화자산운용, 한화투자증권) 등 그룹의 핵심 성장 동력을 유지한다. 반면 신설 법인 ‘한화머시너리앤서비스홀딩스’(가칭)는 한화비전(영상 보안), 한화모멘텀(물류 자동화 및 2차전지 장비), 한화로보틱스 등 테크 솔루션즈 부문과 한화갤러리아,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아워홈 등 라이프 솔루션즈 부문을 영위할 예정이다. 분할 비율은 순자산 가치를 감안해 존속 법인 약 76%, 신설 법인 약 24%로 결정됐다.
이승영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인적 분할은 포트폴리오 최적화와 주주환원 확대를 통한 복합기업 할인율 축소를 목적으로 한다”며 “과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인적 분할 후 합산 시가총액이 증가한 사례가 있는 만큼 사업가치 재평가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시장은 이번 분할이 그동안 주가에 부담으로 작용했던 경영권 승계 관련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장원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독립 경영으로 성장 사업에 주력하는 사업군별 맞춤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며 “분할은 가치 희석이 아닌 사업과 지배구조 재편을 통한 가치의 재평가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주환원 강화 기대
한화가 이번에 던진 진정한 ‘충격요법’은 주주환원 정책에 있다.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 따르면, 한화는 보유 중인 자사주 7.5% 중 임직원 성과 보상분(RSU)을 제외한 5.9%(약 445만 주)를 2026년 6월 이내에 소각하기로 했다. 자사주 소각은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당 가치를 직접적으로 높이는 가장 강력한 주주친화 정책 중 하나다.
배당정책 또한 파격적이다. 2026년부터 보통주 기준 최소 주당 배당금(DPS)을 1000원으로 설정했다. 이는 직전 배당금인 800원 대비 무려 25% 오른 수치다. 여기에 제1우선주 전량을 장외매수 후 소각할 방침까지 밝히며 주주 권익 보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박종렬 흥국증권 연구원은 “기존 보유 자사주 이익 소각 단행은 타 지주사에도 귀감이 될 만한 결정”이라며 “주력 자회사 지분가치 상승과 적극적 주주환원 확대를 감안해 목표 주가를 상향한다”고 밝혔다. 삼성증권 역시 주주환원의 예측 가능성이 향상되면서 지주회사 주주의 체감 수익률이 개선되어 순자산가치(NAV) 할인율이 구조적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뚜렷한 성장 의지 드러내
한화는 단순한 구조조정을 넘어 구체적인 2030 성장 목표치(KPI)를 제시하며 투자자들에게 명확한 비전을 공유했다. 존속 법인은 2030년까지 연평균 매출 성장률(CAGR) 10%와 자기자본이익률(ROE) 12% 달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특히 방산·우주항공 부문에서는 연평균 20~25%의 고성장을 예고하며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신설 법인의 성장 목표는 더욱 공격적이다. 신설 법인은 2030년까지 연평균 30%의 매출 성장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향후 5년간 지주 산하 투자액 총합 4조7000억 원(설비투자 2조1000억 원, R&D 2조 원, M&A 600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특히 한화비전을 AI 및 클라우드 기반 비전 솔루션 기업으로, 한화모멘텀을 2차전지 장비 시장의 글로벌 톱티어로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이승웅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신설 법인의 고성장이 가시화될 경우 존속 법인의 견고한 가치와 신설 법인의 성장성이 부각되며 합산 기업가치의 리레이팅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한화호텔앤리조트의 장부가액에 아워홈 등의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독립 경영 체제에서의 가치 재평가가 기대된다는 분석이다.
주가 전망은
시장의 반응은 뜨겁다. 한화의 주가는 올해 들어 두자릿 수 상승률을 기록 중인데, 인적 분할과 밸류업 계획에 대한 기대감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이에 따라 증권사들은 일제히 목표 주가를 상향 조정했다. BNK투자증권이 18만 원으로 가장 높은 목표가를 제시했고, 흥국증권 17만5000원, 유안타증권 16만5000원, 현대차증권 15만7000원, 삼성증권 15만 원 순이다.
주가 상승의 핵심 동력은 역시 NAV 대비 할인율의 축소다. 그동안 한화의 시가총액은 보유 상장사 지분가치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하게 저평가되어왔다. 2025년 12월 기준 상장사 지분 가치는 19조4000억 원에 이르지만, 시총은 6조 원대였다. 그런데 최근 9조 원대로 올라서며 저평가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다만 리스크 요인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삼성증권은 “신설 법인의 경우 4조7000억 원 규모의 투자 계획 달성을 위한 구체적 재원 마련 계획과 배당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시성 확보가 향후 주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이라크 건설사업의 진척 속도나 글로벌 경기 변동에 따른 주요 계열사의 실적 변동성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분할 일정에 따른 주가 이벤트는 챙겨야 할 대목이다. 오는 6월 30일 분할 승인 주주총회를 거친 뒤, 6월 30일에는 신주 배정 기준일이 된다. 하지만 주주로서 분할을 받으려면 앞서 4월 30일에 주식을 들고 있어야 한다. 본격적인 분할 기일은 7월 1일이고, 같은 달 24일 신설지주회사가 재상장한다.
고윤상 한국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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