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5월 미국 실리콘밸리 엔비디아의 본사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목적은 젠슨 황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CEO)와의 미팅. 당시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그래픽D램 등을 매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동맹'이라고 부를 수준은 아니었다.
이날 처음으로 젠슨 황을 마주한 최 회장은 그의 비전을 듣고 인공지능(AI) 산업의 성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최 회장은 대만에서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와 만나 'AI 생태계 연합'과 관련한 비전을 공유했다.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은 SK하이닉스·엔비디아·TSMC 'AI 반도체 3각 동맹'은 이렇게 시작됐다.
2021년 5월 최 회장이 젠슨 황, 모리스 창을 만난 이후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 TSMC의 '생태계 연합'은 속도를 냈다. 2024년 4월 미국 출장에서 젠슨 황, 6월 대만에서 웨이저자 TSMC 회장을 만난 최 회장은 "세 회사가 협력해 AI 병목현상을 해결하자"며 생태계 연합을 제안했고, 황 CEO와 웨이 회장도 '좋은 생각'이라며 호응했다. SK하이닉스가 만든 HBM을 TSMC가 받아 그래픽처리장치(GPU)와 패키징하고, 최종적으로 엔비디아의 AI 가속기를 생산하는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올해 본격화하는 6세대 HBM(HBM4)에서 TSMC의 공정을 두뇌 역할을 하는 로직 다이에 활용하는 그림도 최 회장이 직접 그렸다.
2012년 SK그룹 인수 전 '망해간다'는 얘기를 듣던 SK하이닉스의 고속 성장에도 최 회장의 리더십이 역할을 했다. 최 회장은 인수 직후 임원 100명과 '일대일'로 만나 당시 하이닉스반도체의 야성과 SK의 시스템 경영을 섞었다. 이후 18년 만의 신규 공장 투자를 시작으로, SK하이닉스 인수에 버금가는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현 솔리다임) 인수를 이어가며 업계 위상을 재정의했다.

HBM의 성공도 SK하이닉스 특유의 조직문화가 만든 성과로 평가된다. HBM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2세대 HBM(HBM2)를 고객사에 제대로 공급하지 못한 '실패'의 경험은 3세대 HBM(HBM2E)를 거쳐 엔비디아 물량을 사실상 독점한 명작 4세대 HBM(HBM3)로 이어졌다. 엔비디아의 따라잡기 힘든 제품 개발 스케줄에 맞춰 하이닉스가 AI 반도체 시장에서 HBM으로 '적시 공급'을 이뤄낸 것도 기술 리더십 아래서 조직원이 원팀으로 포기하지 않고 개발에 정진한 결과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성공 비결에 대해 "HBM 스토리의 핵심은 AI"라며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SK그룹을 포함한 기업의 성공과 실패는 무엇이 좌우할까. 결국 AI다. 최 회장은 책의 마지막 챕터 '최태원 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AI 생태계에 포함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기업의 가치와 운명 등 모든 성패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어요. 지금까지 AI 반도체가 만든 임팩트는 서곡에 불과합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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