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인류의 생산성과 안보 지형을 송두리째 바꿀 인공지능(AI)은 사실상 미국과 중국만의 전쟁터로 굳어지고 있다. 다른 국가들도 기술개발을 이어가고 있지만, 투자 규모·컴퓨팅 자원·생태계 지배력의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면서 ‘산발적 노력’만으로는 격차가 구조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이에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박경렬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등 전 세계 29명의 석학은 한목소리로 ‘AI 브릿지 파워’ 간 협력을 통해 미·중 양강 구도에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AI 컴퓨팅 역량은 미국에 약 75%, 중국에 15%, EU에 5% 수준으로 집중돼 있다. 투자 격차도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2025년 미국 기업의 AI 인프라 지출이 3000억달러 이상, 중국은 1000억달러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구조 속에서 세계가 마주한 선택지는 두 갈래로 굳어지고 있다. 하나는 미국 또는 중국의 AI 모델을 채택해 핵심 기능을 외부에 맡기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 노출 위험까지 떠안는 ‘종속’이다. 다른 하나는 종속을 우려해 도입을 늦추다가 산업 생산성, 사이버 안보 등 핵심 지표에서 뒤처지는 ‘열세’다. 실제 중국은 일대일로의 ‘디지털 실크로드’와 연동해 비서방권에 자국 AI 모델을 공격적으로 보급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보고서에 따르면 딥시크의 국가별 점유율은 벨라루스 56%, 쿠바 49%로 나타났으며, 에티오피아·짐바브웨·우간다·니제르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11~14% 수준을 기록했다.
그간 한국을 포함한 많은 신흥국의 전략이었던 ‘패스트 팔로잉(빠른 추격)’도 AI판에서는 통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초기에 더 싸 보이지만 비용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프런티어 국가는 AI 발전의 경제적 이익을 크게 가져가 추가 개발 재원을 마련하지만, 추격자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 나아가 선도 AI가 최고 전문가의 R&D 역량을 보강·모사·초월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면, 패스트팔로잉 전략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
우선 가장 크게 기대해볼 수 있는 효과는 ‘비용 절감’이다. AI 사용(추론) 비용은 각국 인구와 수요에 따라 분산되지만, AI 학습과 개발 비용은 한 나라의 사용자 수와 무관하게 막대한 고정비로 발생한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여러 브릿지 파워국이 모델 학습에 필요한 높고 고정적인 비용을 나눠 부담하면, 단일 국가가 독자적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의 역량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러 조사 기관에 따르면 첨단 AI 인프라 및 학습 비용은 모델 당 지난해 약 30억달러 수준에서 2028년 206억달러까지 급증한다.

유럽은 이미 공공 컴퓨팅을 축으로 협력에 나서며 인재·자원·비용 절감 등을 도모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4월 EU는 ‘유럽 AI 대륙 행동계획’을 발표하며 300조원 규모의 민간·공공 자본 동원 계획을 내놨고, 여기에 AI 기가팩토리 구상 등이 포함됐다. 각 시설에 약 10만 개의 최첨단 AI 칩을 탑재하는 ‘기가팩토리’와 독일의 ‘주피터’, 프랑스의 ‘알리스 레코크’ 같은 공공 슈퍼컴퓨터가 필요한 역량을 단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연구진은 여기에 다른 브릿지 파워들이 가진 자원까지 결합되면 선택지가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봤다. 특히 “딥시크와 미스트랄은 아키텍처 혁신과 전략적 집중을 통해 다른 최첨단 모델 대비 적은 비용으로 성과를 냈다”며 “미·중 수준의 지출을 하지 않고도 프런티어에 근접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조사기관 카슨스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GW) 비중은 미국 44%, 중국 16%였고, 유럽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는 31%로 집계됐다. 데이터까지 공동으로 확보하고, 각자 가진 컴퓨트·인재·데이터 자산을 다국적 파트너십으로 조정·결합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혁신 일로를 걷는 미·중이 챙기지 못하는 윤리·신뢰성까지 확보할 수 있다. 지정학적 함의를 강하게 띠는 ‘미들파워’ 대신 ‘브릿지 파워’라는 표현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를 반영한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그는 “미·중이 압도적인 건 맞으나 AI 모델 만으로 기술이 진화하지 않는다”며 “신뢰성이 전제돼야만 하는 기술에 대한 수요가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나라 간 ‘연결’이라는 의미를 담아 용어를 썼다”고 말했다.
특히 유럽식 규제를 둘러싼 시각차는 ‘협력의 실행력’과 직결되는 변수로 지목된다. 유럽 내부에서도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질수록 규제가 혁신을 저해하거나 기업에 과도한 규범 준수 비용을 떠넘긴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보고서가 빠른 의사결정과 자원 배치가 가능한 거버넌스를 주문한 것도 이런 현실을 의식한 대목으로 읽힌다.

그럼에도 CERN, 에어버스, ITER 같은 다자 프로젝트는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거대 기술은 한 국가의 단독 질주가 아니라, 위험과 비용을 관리할 수 있는 협력 구조를 함께 만들며 발전해 왔다는 측면에서다. 박 교수는 애치슨-릴리엔탈(Acheson?Lilienthal Report) 보고서를 예로 들었다. 2차 세계대전 후 핵무기의 강력한 통제와 평화적 활용 가능성을 오펜하이머 등이 제시한 보고서로, 당장 완성된 해법을 내지 못했더라도 이후 거대 과학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지적 자산으로 축적됐다는 흐름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지금 제안이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 후속 연구를 이어갈 것”이라며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한국도 연대 속에서 리더쉽을 발휘해야 3대 강국으로 올라설 것"이라고 말했다.
최영총 기자 youngch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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