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회사 사무실을 통과하는 순간, 자리에 앉기도 전에 메신저 알림이 울리고, 읽지 않은 메일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답장을 보내고, 보고서를 고치고, 결재선을 따라 문서를 올린다. 해야 할 일들은 언제나 정직한 순서로 기다려주지 않는다. 동시에 밀려오고, 나는 선택하기보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일정이 일정 위에 쌓이다가 커서를 멈춘 몇 초 사이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 지금… 왜 이걸 하고 있지?” 이러한 의문은 번아웃이 아니다. 몸이 망가질 만큼 지친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무기력한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맡은 역할은 해내고 있고, 주변에서는 ‘잘하고 있다’는 말도 듣는다. 그럼에도 마음 한가운데가 살짝 흔들린다.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어긋나 있는 감각. 존재가 잠시 제자리를 잃는 순간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 상태를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얼핏 철학 교과서 속 문장처럼 보이지만 회사라는 공간에 가져오면 의외로 현실적이다. 우리는 ‘사원’, ‘대리’, ‘과장’이라는 본질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기획자나 개발자, 영업 담당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던져졌고, 그다음에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정의해간다. 직무와 직책은 나를 설명하는 언어일 수는 있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회사가 내게 부여한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정체성 전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자리를 ‘나 자신’이라고 착각할 때 발생한다. “나는 그냥 이 회사의 직원이야.” “내가 뭘 바꿀 수 있겠어.” 이런 말들은 현실을 설명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나를 빠르게 축소시키는 주문에 가깝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의 의미는 태도와 해석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하라니까 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할 때, 나는 시스템의 부품이 된다. 설명 가능하고, 대체 가능하며, 없어져도 큰 혼란은 없는 존재. 이 상태에서는 성과를 내도 공허하고, 실수를 하면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가치는 언제나 외부 기준에 매달려 흔들린다.
하지만 아주 미세한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이 결과로 나의 기준을 증명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는 주체가 된다. 조직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선택으로 일하느냐가 나를 결정한다. 보고서 한 장을 써도, 메일 한 통을 보내도, 그 안에는 ‘회사 요구사항’뿐 아니라 ‘나는 이런 기준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메시지가 담긴다.
이것은 일을 사랑하라는 말도, 사명감으로 무장하라는 요구도 아니다. 모든 업무에서 거대한 의미를 발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오히려 훨씬 냉정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다. 생각하지 않기로, 질문하지 않기로, 그대로 흘려보내기로 결정하는 것 역시 내가 내린 판단이다.
우리는 종종 회사를 핑계로 자신을 숨긴다. “어쩔 수 없잖아.”, “위에서 시켜서 하는 거지.”, “다들 이렇게 하니까.”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대로라면, 그 ‘어쩔 수 없음’조차 선택의 결과다. 저항하지 않기로, 나의 기준을 잠시 내려놓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의 결과 역시 온전히 내가 감당하게 된다는 점이다.
오늘 주어진 일을 그저 월급을 위해 견뎌낼 것인가, 아니면 내 존재의 기준을 증명하는 결과로 만들 것인가. 일은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 하루를 통과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전자는 하루를 소모하고, 후자는 나를 조금 정의한다.
우리는 언젠가 회사를 떠난다. 직함도, 직무도 내려놓는다. 그때 남는 것은 ‘어디에서 일했는가’보다 ‘어떻게 선택하며 일했는가’다. 존재는 그렇게 쌓인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 질문을 피하지 않았던 순간들, “어쩔 수 없음”이라는 말 뒤에 숨지 않았던 태도들로.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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