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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에너지의 디테일…양자역학에 빠진 서도호

입력 2026-01-22 17:25   수정 2026-01-22 17:26


‘당신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한국 현대미술의 중추인 서도호 작가가 30년 넘게 던져온 질문이다. 어느 시기, 누구와 함께, 어떤 시절을 통과했느냐에 따라 ‘그 집’의 의미는 달라진다. 집은 정체성의 근원이자 기억의 저장소다.

지난해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장장 6개월간 이어진 대규모 개인전 ‘제네시스 익스비션-서도호: 워크 더 하우스(Walk the House)’를 마친 서 작가를 그의 집 인근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올해 8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런던 북동부 이즐링턴의 조용한 주택가. ‘DO HO Limited’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자 그의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한 방엔 사람 뒤에 또 사람, 그 사람 뒤에 또 사람이 이어지는 드로잉이 벽면 가득하다. 또 다른 방에는 색색의 실과 재봉틀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테이트모던의 서도호 개인전은 여러 기록을 남겼다. 도록은 품절 사태가 벌어져 세 차례 더 찍었고, 1만2000부 이상 판매됐다. 2025년 5월 1일 시작해 10월 19일 끝나기로 한 전시 기간도 1주일 연장됐다. 이 전시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관람자들의 태도. 체류 시간이 다른 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었다. 40분이 넘는 영상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관람객, 한번 지나갔던 동선을 거꾸로 다시 걷거나 여러 번 다른 동선으로 이동하는 사람들까지…. 서 작가도 그런 모습에 조금 놀랐다고 했다.

▷런던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마무리한 소감이 어떤가요.

“미국과 아시아 곳곳에서 전시를 많이 했지만, 런던 전시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가족들이 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두 딸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아빠가 런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다’는 건 다른 차원이었어요. 딸의 친구들, 그들의 부모까지 서도호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게 됐으니 비로소 런던이라는 사회에 조금 더 가깝게 들어간 것 같다고 할까요. 코로나 팬데믹 등 여러 우여곡절로 준비 기간만 5년 이상 걸렸네요.”

▷집 그리고 이주와 경계에 대해 주로 다뤄왔는데 런던은 어떤 의미인가요.

“미국 뉴욕, 독일 베를린 등 많은 도시에서 살았지만, 서울과 런던의 집이 지금 저에겐 제일 중요한 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 집은 자식으로서 부모 밑에서 살았던 집이고, 런던은 부모가 돼 자식이 생긴 공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웃음)”

▷테이트모던 전시가 연장되며 큰 화제였습니다.

“저는 작품이 스튜디오에서 빠져나가면 마음이 벌써 다른 데로 가 있어요. 에너지가 확 바뀌죠. 그래서 전시장을 가거나 제 작품 앞에서 설명하는 걸 꺼리는데, 이번엔 각지에서 많은 분이 오셔서 마지막엔 거의 매일 전시장을 드나들었어요.”


서도호는 장르를 특정하기 어려운 작가다. 건축가, 화가, 설치미술가, 미디어 아티스트…. 여러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로 셀 수 없이 계산하고, 정교한 디테일을 뽑아내기 때문일 테다. 테이트모던에서의 전시는 관람 동선과 조명까지 작가의 손에서 설계됐다.

▷동선을 없앤 전시였는데, 오히려 자유로운 동선이 생겨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미술관도 좀 놀란 것 같았습니다. 원래 전시를 기획할 때 1-2-3 순서의 번호를 달고 동선을 만드는데, 저는 관람객의 자유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동선을 굳이 짜지 않고, 사람들을 작품 사이로 걸어다니게 했으니까요. 천으로 만든 집을 감상하다 보면 전시장의 벽면이 보이고, 그 벽면 앞에 선 사람이 보이고, 뒤로 돌아가면 작품의 뒷면까지 다 보이잖아요. 누군가 짜놓은 동선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거죠. 제 작품은 그렇게 봐야 하는 작품들이에요. 회화의 역사가 3000년 이상인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그림의 뒷면을 볼 수가 없었죠. 투명한 천으로 작품을 해 온 것은 늘 궁금해왔던 그 ‘뒷면’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예요.”

▷과거의 작품들도 ‘뒷면을 보려는 움직임’이 많았죠.

“대학원 졸업작품을 했던 1987년이었어요. 산을 그린 네 개의 패널 작품을 벽에 걸지 않고, 바닥 위에 조각처럼 세워뒀어요. 사람들이 작품 사이를 오가면서 경험하라는 의도였죠. 그땐 설치라는 말 자체가 없었던 때였어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 서울 인사동의 관훈미술관을 대관해 전시할 때도 그랬어요. 퇴계원의 한 폐공장 일부를 작업실로 썼는데, ‘나의 숨을 미술관까지 옮겨가자’는 생각을 했죠. 풍선에 나의 숨을 담아서 전시장으로 옮겨가는 콘셉트요. (10개까지 불다가 도저히 못 불어서 펌프로 대체하긴 했지만) 이동, 이주, 천 작업 등의 아이디어도 거기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하지만 몰입형 예술이라는 말은 거부하신다고요.

“관객을 제 작품 안에 넣는 이유는 그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들어가라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의 몸을 움직여서 그 움직임 자체로 작품을 감상하는 게 또 작품이 되는 것이죠. 인터랙티브, 이머시브 같은 말들은 몰입을 강요하는, 의도적인 언어죠. 작품에 몰입한다는 건 순전히 움직임의 결과입니다. 몰입형 예술이 좋고 나쁘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본질은 흐리고 꾸미는 게 많아지는 걸 경계하는 겁니다.”


서 작가는 꽤 오랜 시간 ‘양자 역학(quantum physics)’에 심취했다. 양자 역학은 ‘아주 작은 세계’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하는 현대물리학의 기초 이론. 에너지나 운동량이 덩어리로 존재하는 동시에 파동성을 지니는데, 쉽게 말해 관측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다룬다. 서 작가가 창조하는 작품의 디테일은 입이 벌어질 정도. 그것은 집요한 관찰과 붙잡아둔 기억에서 나온다는 지점에서 양자 역학과 맞닿아 있었다.

▷양자 역학은 어떤 이유로 흥미를 느끼셨나요.

“양자 역학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에요. 우리 동양 사상에 불교나 도교에서 이미 많이 다뤄온 주제거든요. 동양 산수화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궁궐 뒤에 산이 있고, 하늘이 있고,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보이고. 한 시점이 아니라 다시점으로 내려다보고 그린 게 많죠. 앉아서 그린 게 아니라 기억에 의지해서 그린 거예요. 화실에 앉아 있지만, 그의 혼은 자신이 가본 궁궐이나 산을 바라보면서 그린 것이라는 얘기죠. 정해진 자리에 모델 및 사물을 놓고 한 시점에서 그린 서양화와는 다릅니다. 결국 몸의 경험이 기억이 되고, 그 존재가 두 군데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안과 밖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눈으로 당장 인지할 수 없는 공간까지 바라보는 것, 양자역학에서 순간이동의 원리하고 닮은 개념 아닐까요.”

▷작품마다 색이 정말 조화롭습니다. 색을 쓰는 기준이 있습니까.

“처음부터 색상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예컨대 빨간색은 열정, 핑크색은 사랑과 같은 로맨틱한 의미나 상징 같은 건 제 작품에 전혀 없어요. 그냥 제가 거쳐온 무수한 공간을 구별하기 위해 색을 쓰기 시작했죠. 컬러 코딩을 하기 위해서 쓴 것이고,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계를 얘기하려고 쓴 거예요. 그럼에도 색은 빛의 파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이긴 합니다. 모든 색은 우리 눈을 현혹하죠. 어쩌면 저는 색을 의심하며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런던=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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