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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원자재 부국의 원자재 주도권이 글로벌 원자재 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들 기업이 자원은 풍부하지만 신용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에 대규모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면서다. 원자재 업체는 그 대가로 해당 국가의 자원을 대규모로 확보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이 주도하던 글로벌 공적 금융 질서가 퇴조한 사이에 민간 기업이 개발도상국의 '최종 대부자'의 지위로 올랐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족한 글로벌 무역금융
27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글로벌 무역금융 격차는 2조 5000억 달러에 달한다. 해당 격차는 기업이 무역을 위해 필요한 자금의 수요 대비 실제 은행 공급의 부족분을 뜻한다. 2016년 1조 5000억 달러였던 이 격차는 거의 10년 만에 60% 이상 급증했다.은행들이 지갑을 닫은 첫 번째 이유로 '규제의 역설'이 꼽힌다. 바젤III 및 바젤 IV 등 금융 규제 적용으로 은행의 자기자본 규제가 강화됐다. 은행이 신용도가 낮은 신흥국이나 가격 변동성이 큰 원자재 기업에 대출을 해주려면 과거보다 훨씬 많은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은행 입장에서 원자재 무역 금융은 더 이상 '저위험 고수익' 상품이 아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압박도 있다. 전 세계적인 탈탄소 흐름 속에서 화석연료나 환경 파괴 논란이 있는 광산 개발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는 은행은 낙인찍히며 주주와 시민단체의 거센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 평판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서구권 주요 은행은 원자재 관련 위험노출액을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 무역 공백을 메운 것이 원자재 상사들이다. 매켄지의 파트너 요샤 샤브람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광업이나 오일가스 분야에서 은행이 국가 리스크나 신용 리스크를 이유로 대출을 꺼리면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원자재 트레이더들이 자신들이 창출한 대규모 자본과 현금을 들고 직접 뛰어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관련 기업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이어진 공급망 혼란과 에너지 위기 속에서 큰 수익을 올렸다. 석유 중개업체 비톨은 2024년 매출 3310억 달러를 기록했다. 트라피구라 역시 2025 회계연도(2025년 9월 종료) 기준 순이익 26억 6600만 달러, 그룹 자기자본 161억 7200만 달러를 쌓아뒀다.
OECD는 2023년 보고서에서 "대형 글로벌 은행들이 무역 금융에서 빠지면서 원자재 상사들이 산유국이나 광물 생산국 정부에 대해 점점 더 '최종 대부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명시했다.
대규모 원자재 선구매
원자재 상사들 금융 전략의 핵심은 '선급금 지급'과 '오프테이크(앞으로 생산될 물량을 일정 조건으로 장기 매입)'가 결합한 패키지 딜이다. 구조는 간단하다. 트레이더는 자원 생산자에게 미래에 생산될 자원을 담보로 거액의 현금을 선지급한다. 생산자는 이를 받아 당장 필요한 운영 자금이나 시설 투자비로 쓰고, 빚은 현금이 아닌 '실물 자원'으로 갚는다.단순한 상거래처럼 보인다. 하지만 고도의 파생상품과 구조화 금융 기법이 숨어 있다. 최근 세계 자원 시장을 흔들고 있는 주요 관련 '빅딜'들을 보면 이들의 전략이 얼마나 정교하고 과감해졌는지 알 수 있다. 지난 8일 스위스 트레이딩 기업 머큐리아가 카자흐스탄 최대 구리 생산 기업인 카작무스와 체결한 12억 달러 규모의 계약이 대표적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머큐리아는 카작미스의 지배구조 개편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향후 8년 동안 생산되는 구리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했다. 계약 초기 4년 동안은 연간 약 20만 톤의 구리 양극재를 인수하는 조건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간 20만 톤은 카작미스 전체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카자흐스탄 전체 제련 구리 생산량의 약 40%에 육박하는 물량이다. 머큐리아의 금속 부문 글로벌 책임자인 코스타스 빈타스는 "이번 거래는 금속 시장 역사상 가장 큰 선급금 거래 중 하나"라며 "과거 에너지 시장에서 볼 수 있었던 규모와 기간이 이제는 금속 시장으로 전이된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자원 소비국의 국부펀드나 국책은행의 지원을 받고 관련 계약 리스크를 떨어트린 사례도 있다. 지난 14일 트라피구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입은행과 8억 달러 규모의 '핵심 광물 보험 정책' 계약을 체결했다. 사우디 EXIM이 트라피구라가 전 세계 광산에 제공하는 선급금에 대해 신용 보험을 제공하면, 트라피구라는 확보한 광물을 사우디아라비아의 산업망에 우선 공급한다.
사우디는 자국 제조업 육성을 위해 트라피구라의 글로벌 소싱 능력을 활용하고, 트라피구라는 사우디라는 든든한 지원자를 얻어 아프리카와 남미 등 고위험 지역 진출을 가속할 수 있게 됐다.
사우디 EXIM의 CEO 사드 알칼브는 "오늘날 광물은 단순한 산업 투입재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의 전략적 구성 요소"라며 "국경 간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유연한 금융 수단을 요구하며, 트레이더와의 협력이 국익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선 원자재 기업이 사실상 국가 예산을 집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도 있다. 우간다 국영 석유회사는 정유 시설 건설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구권 은행들은 외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손을 내민 것이 비톨이다.
비톨은 지난달 우간다에 2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7년 만기, 금리 4.92% 조건으로 대출해 주기로 했다. 우간다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거액이다. 비톨은 이 돈을 대주는 대신 우간다 원유의 독점적 유통권과 인프라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다른 글로벌 원자재 기업 글렌코어는 아르헨티나의 대규모 투자 인센티브 제도인 RIGI(Incentive Regime for Large Investments)를 활용해 엘 파촌 구리 프로젝트 등에 약 135억 달러 규모의 잠재적 투자를 신청했다. RIGI 적용을 받게 되면 글렌코어는 향후 30년간 세제 혜택, 관세 면제, 외환 시장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보장받는다.
글렌코어 CEO 게리 네이글은 "RIGI 프레임워크는 아르헨티나의 투자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주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핵심 촉매제가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원자재 트레이더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것을 넘어 투자 대상국의 법적·제도 자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단계로 진화했다는 뜻이다.
고금리와 빼앗긴 원자재 주권
트레이더들의 자금 지원은 자원 부국엔 '양날의 검'이다. 당장의 급한 불(외채 상환, 인프라 투자, 지배구조 개편)을 끌 수 있는 소방수는 트레이더들이다. IMF의 구제금융은 강도 높은 긴축 재정과 구조 개혁을 요구한다. 하지만 트레이더들은 대부분 원자재만 요구한다. 정치적 부담을 피하고 싶은 정권에게는 달콤한 유혹이 될 수 있다.하지만 일부 원자재 기업은 원자재만 가져가지 않는다. 트라피구라가 광산 기업 오르바나의 자회사 EMIPA와 체결한 2500만 달러 선급금 계약을 보면, 금리는 'SOFR(미국 무위험 지표 금리) + 8.0%'라는 고금리가 적용됐다. 당시 시장 금리를 고려하면 10%를 넘는 수준이다.

할인율도 따져봐야 한다. 트레이더들은 원자재를 인수할 때 국제 시세에서 일정 비율을 할인받는다. 미국 법무부(DOJ) 공개 문서에 따르면 비톨이 에콰도르 국영석유사와 체결한 계약의 경우, 30개월간 3억 달러를 선지급하는 대가로 연 6.85%의 할인율을 적용받는 조건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트레이더가 챙기는 숨겨진 수익이다.
마케팅 수수료도 있다. 원자재 기업은 생산된 자원을 글로벌 시장에 독점적으로 판매하면서 수수료도 챙긴다. 생산국은 은행 대출보다 훨씬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자원을 헐값에 넘기는 구조가 될 수 있다.
긴 계약 기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자원 담보 대출 만기가 통상 2~5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8년, 10년, 심지어 일부 국영기업 간 거래에서는 20년까지 늘어나는 추세다. 한 국가의 정권 주기보다 긴 시간 동안 핵심 자원의 통제권이 외국 사기업의 장부 속에 묶이는 셈이다. 해당 국가의 자원 정책 자율성을 장기간 제약하는 '주권의 저당'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국제기구도 위협
원자재 기업의 부상은 IMF의 권위도 위협하고 있다. 아프리카 차드와 콩고공화국 사가 대표적이다. IMF가 이들 국가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려 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은 글렌코어나 트라피구라가 보유한 '자원 담보 부채'였다. 트레이더들은 국가가 파산 위기에 몰려도 "우리는 원자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며 채무 재조정을 거부하거나 우선 변제를 요구했다.IMF는 콩고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기 전에 이들 사기업 채권자와의 협상을 선결 조건으로 내걸어야 했다. 사기업이 한 국가의 거시경제 회생 여부를 결정하는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5 무역개발보고서에서 "주요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들은 전통적인 무역 중개를 넘어 공급망과 금융 네트워크의 핵심 노드가 되었으며, 식량 및 에너지 부문에서 사실상 그림자 은행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OECD 역시 "트레이더들은 은행보다 규제와 감독을 덜 받기 때문에, 이들을 통한 자금 흐름은 불법 자금 리스크나 부패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미국 법무부(DOJ)에 따르면, 원자재 투자 기업 건보와 트라피구라는 최근 몇 년간 에콰도르와 브라질 등에서 뇌물 수수 혐의로 각각 6억 6000만 달러, 1억 2700만 달러의 벌금 합의를 했다.

데이비드 미할리 천연자원거버넌스연구소 선임 분석가는 "자원 담보 대출은 고도의 도박과 같다"며 "많은 경우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부채와 국가의 핵심 자산에 대한 담보 상실 위험을 초래했다"고 경고했다.
2004년부터 2018년까지 확인된 자원 담보 대출만 52건, 총액 1640억 달러에 달한다. 최근 그 규모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시, 이런 보이지 않는 '그림자 부채'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뇌관이 될 수 있다.
트레이더들의 지배력 확대는 '공급망의 사유화'로 발전한다. 과거 공개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던 원자재 물량이 트레이더의 장기 계약으로 사라지고 있다. 머큐리아가 카자흐스탄 구리 20만 톤을 선점하면, 시장에 유통되는 자유 물량은 그만큼 감소한다.
공급이 조금만 줄어도 가격이 폭등하는 '변동성 확대' 구조가 굳어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 원자재 가격의 하방 경직성을 높여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자원 빈국이자 제조업 강국인 한국 입장에선 원자재 기업의 영향이 크다. 반도체, 배터리,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은 모두 해외 자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한국 기업도 자원을 확보하려 할 때, 광산과 직접 계약을 맺을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주요 광산의 미래 생산분은 이미 선급금을 지급한 원자재기업에 저당 잡혀 있다. 한국 기업은 이제 광산주가 아닌, 글로벌 트레이더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트레이더 기업이 원자재 공급망의 문지기가 됐다는 뜻이다. 문을 열어주는 대가로 그들은 금융 비용, 리스크 프리미엄, 마진을 얹은 가격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고스란히 한국 제조업의 원가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일종의 '공급망 통행세'를 내야 하는 처지에 몰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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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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