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화 산업이 거대한 위기 상태(state of great danger)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한국인 감독인 박찬욱은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해 이같이 진단했다. 박 감독은 최근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세계가 환호하는 'K-무비'의 화려한 외양과 달리 내부에서는 산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며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박 감독은 "팬데믹 기간 관객들은 집에서도 충분히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그 이후로 극장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극장 관객 감소는 단순한 관람 행태 변화가 아니라, 영화 산업 전반의 자금 흐름을 막는 구조적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객 감소는 투자 위축으로 직결됐다. 박 감독은 "투자자들은 영화에 투자를 덜 하기 시작했고, 하더라도 대담한 이야기를 선택하지 않는다"며 "소위 안전한 프로젝트만 찾으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극장에는 흥행 공식을 반복한 영화들이 걸리고, 관객들은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며 극장을 찾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 당시를 떠올리며 "나 역시 흥행 실패로 영화계에서 밀려날 위기였다"며 "그때는 밥을 먹을 때도 오직 일 얘기만 할 정도로 절박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과 자신의 국제적 성공이 한국 영화 산업 전체가 호황이라는 인식을 만들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심각한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몇몇 영화들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해서, 산업 전체가 건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박 감독의 시각이다.
박 감독뿐 아니라 영화계 전반에서는 글로벌 OTT 자본에 의존한 단기적 성과가 늘어나는 사이, 극장 중심의 생태계와 창의적 제작 기반이 약화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정부는 대규모 정책 자금 투입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벤처투자와 함께 '2026년 모태펀드 1차 정시 출자'를 공고하고, 총 7300억원 규모의 콘텐츠 정책펀드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대비 약 22% 증가한 역대 최대 규모로, 정부가 내세운 'K-컬처 300조원 시대' 구상의 핵심이다.
이번 정책펀드의 중심에는 문화계정과 영화계정이 있다. 문화계정은 전년 대비 25% 증가한 6500억원 규모로 조성된다. 지식재산(IP) 펀드와 수출 펀드를 각각 2000억원 규모로 조성해 콘텐츠 제작사의 원천 IP 확보와 글로벌 시장 진출을 집중 지원한다. 특히 IP 펀드는 개별 자펀드 규모를 확대해 동일 기업에 대한 지속적 투자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여기에 공연·영상·게임 등 핵심 분야의 신기술 개발을 겨냥한 '문화기술(CT) 펀드'(1000억원), 창업 초기 기업과 신성장 분야를 지원하는 '콘텐츠 신성장 펀드'(750억원), 인수합병과 회수시장 활성화를 목표로 한 'M&A·세컨더리 펀드'(750억원)도 새롭게 포함됐다. 제작 지원을 넘어 산업 전반의 성장과 회수 구조까지 고려한 구성이라는 평가다.
영화계정 역시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총 818억원 규모로 조성되는 영화계정에는 정부 출자액 490억 원이 투입되며, 정부 출자비율은 기존 50%에서 60%로 상향됐다. 민간 자본의 부담을 낮춰 자펀드 결성과 투자 집행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한국 영화 메인 투자 펀드는 조성 목표액을 567억원으로 확대해 강소 제작사 육성에 나서고, '중·저예산 한국 영화 펀드'(134억원)와 '애니메이션 전문 펀드'(117억원)를 통해 작품 다양성과 제작 저변을 넓힌다는 계획이다. 문체부는 이를 통해 극장용 한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을 동시에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문체부 임성환 문화산업정책관은 "'K-컬처 300조 원 시대'를 위해 콘텐츠 산업 투자 마중물 공급은 핵심 요소"라며 "2026년 콘텐츠 정책펀드는 신성장 분야부터 회수시장까지 포괄해 콘텐츠 기업의 안정적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정책펀드의 방향성에는 공감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정부가 위기를 인식하고 대응에 나섰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극장 기반이 급속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800억원대 영화계정이 산업 전반을 되살릴 만큼 충분한 규모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근 중·대형 상업영화 한 편의 제작비가 100억원을 훌쩍 넘는 현실을 고려하면, 정책펀드 자금이 개별 프로젝트에 얼마나 실질적으로 투입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정책펀드가 일정 부분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극장 관객 회복과 투자 구조 개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하지 못한다면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금 지원만으로 침체된 시장을 되살리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관객이 다시 극장을 찾을 수 있도록 상영 환경과 유통 구조, 제작 생태계 전반에 대한 제도적 재정비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데 업계의 의견이 모인다. 정책펀드가 단순한 재원 공급을 넘어, 창의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들이 꾸준히 나올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계기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는 평가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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