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달 정도 지나면 1400원 전후로 떨어지겠죠.”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신년 기자회견에서 환율 수준과 시점을 콕 집어 언급했다. 전례 없는 최강의 구두 개입에 1400원대 후반이던 환율이 26일 1440원대로 하락했다. 하지만 한번 고착화된 상승 기대 심리를 되돌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시장이 꿈쩍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들어올 달러보다 나갈 달러가 더 많다”는 서사가 외환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한·미 관세협정 후속 조치에 따른 3500억달러 대미 송금과 서학개미·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확대가 달러 유출 우려를 키운다. 1997년과 2008년 외환위기 기억은 이런 불안을 더욱 증폭시킨다. 시장의 공포는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확산된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개입이 아니라 이 서사를 넘어설 수 있는 설명과 설득이다.
먼저 대미 투자 문제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올해 예정된 200억달러 대미 투자는 시기와 집행 규모를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에 명시된 내용이다. 더 중요한 점은 대미 투자가 ‘일방적 송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미 간에 합의한 수익 배분 체계에 따라 원금과 투자 수익은 장기적으로 다시 국내로 환류된다.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해외주식 매입도 ‘일방향 자본 탈출’로 볼 건 아니다. 수익을 붙여 돌아오는 투자다. 실제로 2025년 1~11월 내국인의 해외주식 순투자는 1020억달러에 달했지만 같은 기간 국내 환류된 이자·배당 순유입액은 290억달러를 웃돌았다. 해외 투자가 구조적으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단계로 전환됐음을 뜻한다.
거시 지표로 보면 그림은 더욱 분명하다. 대외금융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대외금융자산(NFA)은 2025년 말 1조달러를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NFA 비율도 2014년 ‘0%’ 수준에서 2025년 55%까지 급등했다. 일본이 55%를 처음 넘긴 해는 2009년이다. 2025년에는 80% 초반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자·배당 소득이 유입됐다. 물론 엔화 역시 약세 압력을 겪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소액투자 비과세 제도(NISA)를 도입해 해외주식 투자를 되레 장려했다. 개인의 해외 투자를 국가의 장기 소득 기반으로 키운 것이다.
대외금융자산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편되는 국제 질서에서 대외금융자산은 국가의 실질적 방파제 역할을 한다. 작년 미국의 3500억달러 송금 요구에 곧바로 외환위기 우려가 제기됐다. 우리 정부의 통화 스와프 요청에 미국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더 이상 동맹의 선의에 기댈 수 없음을 보여줬다. “구시대의 질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다보스포럼 연설이 이를 상징한다. 새 국제 질서에서 믿을 힘은 결국 내 손에 쥔 달러다.
또 하나 더 짚어야 할 사실이 있다. 환율은 국내 외환 수급의 ‘절반’만 반영하는 가격이라는 점이다. 국내 외환시장은 달러를 사고파는 현물환시장과 달러를 빌리고 빌려주는 외화자금시장으로 나뉜다. 두 시장의 규모는 엇비슷하다. 2025년 9월 기준 하루평균 거래 규모는 공교롭게도 두 시장 모두 198억달러 수준이다.
수출 기업이 달러를 벌면 선택지는 세 가지다. ①현물환시장 매도 ②외화예금 ③해외 유보. 환율 상승 기대가 높을수록 기업은 ②나 ③을 택한다. 그 결과 현물환시장에서는 달러 ‘부족’으로 환율이 오르지만 외화자금시장으로의 달러 공급은 증가한다. 외화예금 종착지가 외화자금시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행들은 역대급으로 낮은 비용에 달러를 조달하고 있다. 게다가 수출대금 중 약 1100억달러가 해외에 파킹(③)돼 있다. 이를 감안하면 달러 공급 여력은 이미 충분하다. 1997년과 2008년처럼 두 시장 모두에서 달러가 말랐던 국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환율만 보고 위기를 예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환율 상승을 펀더멘털 악화의 증거로 해석하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환율 하락은 노동시장 개혁이나 생산성 개선의 결과물인가. 환율은 심리와 수요·공급이 교차하는 가격이다. 공포를 자극하는 서사에 휘둘리기보다 구조를 읽는 냉정함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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