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층까지 이어진 3000석 대극장을 마주한 채 무대 위에서 텍스트를 읽는 경험은 공간의 성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이날 흘러나온 음악은 오페라 '라보엠'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을 담은 곡이었다. 40여 분간 이어진 고요한 독서 시간 뒤,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고명재 시인이 등장해 자신의 시와 창작 경험을 들려줬다. 라보엠의 서사와 시인의 사랑과 삶을 엮은 이야기에 일부 참여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휴대전화 알림음 하나 울리지 않을 만큼, 공간은 깊은 몰입에 잠겨 있었다.

최근 대형 공연장을 중심으로 읽고, 쓰고, 나누는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영상 중심의 콘텐츠 환경 속에서 오히려 텍스트에 집중하는 경험을 ‘멋’으로 인식하는 이른바 ‘텍스트 힙(Text Hip)’ 트렌드를 반영한 기획이다.
지난해 신설된 GS아트센터의 참여형 프로그램 '클럽라테(라운드테이블)'의 시 클래스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프로그램은 배움·창작·대화를 결합한 형식으로, 공연장을 찾은 이들을 관객이 아닌 참여자로 받아들인다. GS아트센터는 지난 늦가을부터 연말까지 시인 4명과 함께 '시 클래스'를 진행했다. 참여자들은 사전에 김복희 시인의 <희망은 사랑을 한다>와 유수연 시인의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등 4권을 읽고 온라인으로 감상을 공유한 뒤, GS아트센터에 모여 시인과 대화하고 글을 쓰며 서로의 문장을 나눴다. 올해 9월에도 GS아트센터는 시 클래스를 포함한 클럽라테를 진행할 계획이다.

GS아트센터 관계자는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을 보느냐'에서 '어떻게 경험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며 "텍스트 프로그램은 관객이 스스로 예술의 일부가 되는 통로"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이들은 "흘려보냈던 문장이 다른 사람의 해석을 통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며 "공연장에서 글을 쓰고 낭독하는 경험은 일상에서는 쉽게 얻기 어려운 몰입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문화기획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독서 열풍'으로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다.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와 영상에 대한 피로감, 깊이 있는 관계와 사유에 대한 갈증이 맞물리며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소음과 정보가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느리게 연결되고 싶은 욕구가, 소설보다 비교적 분량이 짧은 시를 통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해석도 나온다.

세종문화회관 무대 위에 놓인 스물일곱 권의 시집과 GS아트센터 둥근 테이블 위의 노트와 펜은 유사한 장면을 만든다. 멀리서 바라보던 예술을 색다르게, 가까이 경험하는 것. 조용한 몰입과 대화를 통해 공연장은 조금씩 다른 방식의 문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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