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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사'와 '노서아'를 다른 나라로 알았던 중국 [김동욱의 세계를 바꾼 순간들]

입력 2026-02-02 09:00   수정 2026-02-05 13:20


아라사(俄羅斯), 노서아(露西亞). 러시아를 표현하던 옛 가차(假借)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기를 처음 만든 중국 청나라에서 아라사와 노서아는 단순히 표기법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적지 않은 기간 중국에선 아라사와 노서아가 다른 나라로 인식됐다. 아라사와 노서아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청나라 강희제 치세 후반부 때다.

이처럼 하나의 나라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나라로 인식된 것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떨어진 지역을 지칭한 이유가 크다. 또 한쪽에선 전투, 한쪽에선 사절단이란 상이한 형식으로 러시아를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의 ‘혀가 짧았던’ 것이었다.

17세기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진출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접촉과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청나라 기록에 러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러시아 하바로프 원정대가 1653년 잉구타 아찬스크에서 청군과 충돌하면서다. 청나라 측 기록에 “나찰(羅刹·Rus, Ros의 음차어)과 전투했다”고 언급되면서 동양 사료에 러시아가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하바로프의 후임으로 스테파노프의 선단이 또다시 아무르강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선정벌의 ‘나선(羅禪)’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적들은 누런색의 비단옷을 입고 서양에서 온 것 같다”는 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러시아인에 대한 묘사다.

비슷한 시기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에 정식 사절을 파견했다. 몽골을 거쳐 들어온 이들 정식 사절의 출신국은 ‘악라사(鄂羅斯)’라고 불렸다. 악라사라는 국명은 ‘Oros’라는 단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데, 이는 몽골어의 특성상 단어 첫머리에 자음이 나올 수 없어 루스란 단어에 모음 O가 덧붙은 것이었다. 결국 루스·루시를 발음하지 못한 몽골인 덕분에 러시아인들은 ‘오로스’인들로 중국에 정식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악라사’에서 ‘아라사(俄羅斯)’가 나오게 된다.

청나라에서 만주 아무르강 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나찰’, ‘노서아’와 페트린 사절단(1618), 바이코프 사절단(1653) 등의 ‘악라사’, ‘아라사’가 같은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1670년 강희제가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네르친스크에 “러시아로 망명한 원주민 지도자를 반환하라”는 내용의 칙서를 보내면서다. 러시아 네르친스크 총독이 차르의 이름을 사칭하며 보낸 답서엔 “청 황제가 러시아 차르에게 복속하라”는 내용이 있었지만, 역관이 ‘의도적으로’ 편지 내용을 오역해 전쟁을 방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충돌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다. 1685년 강희제가 러시아인의 근거지인 알바진 공격을 명하고 지원군이 없던 러시아 수비대장 톨부진의 후퇴로 러시아가 아무르 지역을 포기하면서 1차 전투는 막을 내린다. 강희제는 1686년 2차 공격을 명령했고, 알바진의 러시아 수비대 820명은 만주군 2300명의 공격을 몇 년간 잘 막아냈다. 하지만 1688년 양측 간 협상으로 청군이 철수할 때 알바진의 생존자는 6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어 청의 송고투와 러시아에서 파견된 골로빈 간에 이뤄진 네르친스크 조약은 기본적으로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체결된 불평등조약이다. 1000여 명의 ‘소수’ 러시아 협상단은 대포 100여 문을 갖춘 2만여 명의 청군에게 포위된 채 조약을 맺어야 했다. 러시아 측은 조약의 불공평성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처럼 불평등한 처사에 러시아에서 보복 지원군이 올 것”이라고 엄포를 놓아봤지만 “러시아에서 청나라까지 구원군이 오려면 2년은 걸릴 것이고 그전에 이미 너희들은 모두 시체가 될 것”이라는 청의 반응에 두려움에 떨며 조약을 맺어야 했다고 전해진다.

청 측 대표인 송고투는 말을 탄 게 아니라 ‘가마’에 탄 채 누워서 나타났다. 협상단 대표라기보다 상전으로 앞에 앉는 듯한 느낌이었고, 청 측 협상단은 승려와 서기, 의사, 시종, 요리사에 대검을 든 무사, 양산을 든 사람, 담뱃대를 든 사람 등 (승자로서) 다양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고 러시아 대표 골로빈은 기록하고 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와 청 양국 간 국경 문제와 도망자 반환 문제, 교역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조약의 정본은 이례적으로 한문이나 만주어, 러시아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작성됐다. 당초 양측은 통역으로 몽골인을 썼으나 몽골인 통역의 어학 실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협상이 이뤄지지 못하자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던 예수회 선교사 페레이라와 제르비용이 차출돼 협상 통역을 담당했다.

이에 따라 네르친스크 조약은 특이하게 라틴어본이 정본이 됐으며 만주어본, 러시아어본, 몽골어본이 부본으로 작성됐다. 한문본은 만들어졌지만 정식 부본이 되지 못했다. 조약에 참여한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제르비용이 프랑스어본도 만들었다.

각 부본은 자국에 유리하도록 일부 조약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으며 표현도 상이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라틴어 정본에는 “양국의…”라고 표현돼 러시아와 청나라가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한문본에는 “모든 수렵인은…” 이라고 시작해 ‘중화주의’가 반영된 식이다.

조약의 전체적인 내용도 중국에 유리한 것이어서 러시아는 아무르강 유역권 주장을 포기하고 알바진 요새를 파괴한 뒤 떠나며, 도방자들을 청에 넘기며 주요 사법 권한을 청 측에 일임하는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물론 청나라가 동양 사회의 오랜 관습이던 조공체제를 포기하고 지역 내에서 러시아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연성을 보인 점이 오늘날엔 더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역사학자 모리스 로사비는 러시아로선 알바진 등을 잃었지만 중국과의 교역 물꼬를 튼 것으로 만족했다고 해석했다.

시간이 흘러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역사는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각종 불평등조약으로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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