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야말로 대한민국 문화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멈추지 않는 '멀티플레이어'다. 1965년 데뷔해 반세기 넘게 대중과 호흡했고, 한국 공연 사상 최대 히트작 '난타'를 만들어 브로드웨이까지 진출시켰다. 세계인의 축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메가 이벤트를 진두지휘하던 그가 지금은 다시 연극 무대 위에서 몸에 담이 올 정도로 몰두하며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달 상연을 시작한 연극 '더 드레서'에서 노먼 역을 맡아 관객을 만나고 있는 송승환을 만났다. 오전 10시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 연극 홍보를 마치고 왔다는 그는 여전히 청년 같은 에너지로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시력이 저하되는 시련 속에서도 암전 상황에선 무대 위 발자국 수를 외우며 동선을 암기하고, 소품의 위치를 파악해 연기를 이어가는 그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 궤적을 전했다.

송승환은 10살의 어린 나이에 활동을 시작했다. 국어책을 잘 읽는다는 이유로 나간 웅변대회에서 눈에 띄어 방송가에 발을 들였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 TV 드라마, 어린이 프로그램 MC를 거쳐 20대엔 당대 최고의 라디오 DJ로 활약했다. 그에게 이러한 활동의 확장은 의도적인 선택이 아닌, 주어진 기회에 대한 즐거운 응답이었다.
송승환은 "어차피 배우는 선택하는 직업이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직업이다"라며 "라디오를 하니 TV 섭외가 오고, 드라마를 하니 영화와 연극 섭외가 왔다. 재밌어 보여서 거절하지 않고 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러나 2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선택받아야 하는' 배우의 수동적인 삶에 한계를 느꼈다. "'내가 로미오로 뽑히길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로미오와 줄리엣'을 직접 만들자'는 생각으로 21살 어린 나이에 첫 제작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이 제작자 송승환의 시작이었다.
한국 공연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지만, 송승환은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며 미소를 보였다.
"내가 제작한 게 60여편 되는데 그중 30편은 실패했다. '난타'가 크게 성공해서 실패가 묻힌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가 좌절하지 않고 계속 도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미'였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엔 어떻게 푸느냐는 질문에 "새로운 일을 벌인다"고 답한 송승환은 '건강한 워커홀릭'의 면모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한 가지 일로 고민하다가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저절로 고민이 사라지고 에너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아웃도 없었다"고 했다. "하나의 낚싯대만 보고 집중하다 보면 번아웃이 오지만, 여러 개의 낚싯대를 항상 던져 놓았고, 하나가 안 되면 빨리 버리고 다른 새 낚싯대를 놓았다"면서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소개했다.
"예전엔 방송이 6개월 단위로 개편이 됐다. 배우라는 직업이 일이 끊기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지거든요. 전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기에 드라마가 개편되더라도 그걸 대비해서 영화도 하고, 라디오도 하고, 한 것이다. 그렇게 여러 낚싯대를 관리하다 보니 번아웃이 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재미로 시작했다고 '설렁설렁' 대충하는 법은 없었다. 일단 시작하면 거침없이 행동했기에 지금의 이력이 쌓일 수 있었던 것. 송승환은 "머릿속으로 고민만 하지 않고, 무작정이라 하더라도 일단 실행에 옮겼던 게 지금까지 온 비법이라면 비법 같다"고 했다. 실제로 '난타'의 브로드웨이 공연을 목표로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서울 공연 하이라이트가 담긴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들고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의 극장들을 무작정 찾아다닌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저는 하겠다 하고, 필요하다 싶으면 무조건 만났다. 거절당하더라도 5번 정도 설득하면 넘어오더라고요.(웃음) '난타'가 1999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거쳐 2003년 브로드웨이 뉴빅토리 극장까지 갈 수 있었던 건, 일단 부딪쳤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평창 동계올림픽 총감독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것.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인해 눈앞이 흐릿해졌지만, 그는 인생을 끝내는 대신 '이 눈을 갖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찾았다.
잘 보이지 않기에 연습량을 독하게 늘렸다. '더 드레서'의 경우, 2개월간의 연습 기간 동안 그는 유일한 개근자라고 했다. 후배 배우들보다 더 열심히 연습실을 찾은 것. 보이지 않는 소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그는 무대 위 모든 물건을 순서대로 놓는 원칙을 세웠다. 옷이나 신발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으니 순서대로 정리해두고, 손의 감각으로 위치를 익혔다.
가장 큰 난관은 암전 상태에서의 이동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연습으로 극복했다.
"암전해서 등장할 때 발자국을 세는 것이다. '11발자국 가서 우회전하고 다시 3발자국'. 이렇게 발자국 수를 다 외운다. 저에겐 대사보다 발자국 수를 외우는 게 더 중요했다. 어두워지면 몸을 돌리고, 걸음 수 대로 이동하면, 조명이 켜지면 정확한 위치에 서 있게 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덕분에 연기에 더 깊게 몰입할 수 있게 됐다."
제작자로서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를 챙겨야 했던 중압감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연기에 집중하는 지금이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드라마는 한 컷 찍고 끊어지지만, 연극은 감정이 쭉 이어지잖아요.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크다. 매일 커튼콜 때 박수를 받는 기쁨, 그건 연극 무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권이다."
송승환은 지난 10일 무대 위에서 칠순 축하를 받았다. 공연을 마친 후 객석 관객들과 함께 깜짝 축하 파티가 있었던 것. 이달 관객으로는 송승환의 지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실제로 연예계 마당발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자산으로 '사람'을 꼽았다. 방송 일을 하며 만난 수많은 인연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기본으로는 철저한 '계산'을 꼽았다. 내년이면 설립 30주년을 맞는 그의 제작사 PMC는 지난 30년간 직원 월급 날짜를 하루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배우들 개런티도 한 푼도 떼어먹은 적이 없다. 그런 것들이 이 바닥에서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신용이 된 것 같다. 이번 공연에 450명을 초대했는데, 다 저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모든 게 가능했죠."
송승환은 "70이 넘으면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나이"라며 제작자로서의 욕심보다는 배우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눈 건강 때문에 디테일을 챙겨야 하는 연출이나 제작은 어렵지만, 반복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는 연기는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의 간격을 좁히라고 조언했다.
"좋아하는 일만 좇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다. 현실적으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걸 택하면 그 인생이 최고인 것 같다. 잘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시너지가 생기고,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낼 수 있다. 저 역시 그렇게 살아왔고요."
어떤 타이틀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알아서들 기억해 달라"며 손사래를 쳤다. 젊은 세대에게는 '난타 만든 아저씨'나 '평창 총감독'으로, 누군가에게는 '명배우'로 기억되겠지만 굳이 하나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발자국을 세며 무대를 지키는 송승환. 그의 멈추지 않는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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