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꼭 무언가를 그려야만 미술이고 예술인가. 故최병소 작가는 새까맣게 지워내는 것으로 이 질문에 답했다. 지난해 9월 82세를 일기로 별세한 작가는 일상의 재료를 활용해 한국 실험미술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인물이다.
붓과 캔버스를 뒤로하고, 작가의 시선은 종이와 펜에 머물렀다. 여기에는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 제지 기술이 발달한 지금, 글씨를 쓰다 종이가 찢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1950년대 작가의 학창 시절에는 우리가 흔히 ‘갱지’라 부르는 누런 빛의 거친 종이를 사용해 교과서를 만들었다. 얇고 연약한 이 종이는 필기만으로도 너덜너덜해지거나 찢어지곤 했다. 작가는 이를 모티프로 신문지나 잡지 위에 연필과 볼펜으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작업을 시작한다. 1970년 중반부터 선보인 ‘신문 지우기 연작’이다.

서울 강남구 페로탕 서울에서 작가의 마지막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전시 ‘Untitled’가 진행된다. 작가 타계 이후 처음으로 작품과 만나는 자리이자, 페로탕 서울의 올해 첫 전시다. 1층과 2층 전시 공간에 걸쳐 2015년 작품부터 2024년까지의 작업이 소개된다. 1층 공간에는 기존에 알려진 작가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작품들이 걸렸다. 가장 큰 작품은 높이 160cm에 달하기도 한다. 2000년대 이전에는 주로 80cm 이하의 작업을 선보였지만, 제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작품의 사이즈도 함께 확장됐다.


이번 전시에는 평소에 흔히 볼 수 없던 작품이 공개된다. 백색 화면의 ‘Untitled 0241029’다. 작가는 보통 볼펜으로 수천, 수만 번 선을 그어 칠한 신문지 위에 연필로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층층이 쌓인 잉크와 흑연으로 새까맣게 뒤덮인 대다수 작품과 달리, 더 이상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으로 작업한 이 작품 위에는 볼펜이 지나가며 남긴 자욱과 찢긴 흔적만이 남았다.
작가는 작업 초창기 볼펜이나 연필만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세계가 자리 잡으면서부터 작가는 늘 볼펜과 연필을 함께 사용했다. 볼펜은 꼭 모나미 153을 고수했다. 작업에 열중하는 기간에는 일주일에 100개 정도의 볼펜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신문지를 지운 작가의 작품을 1970년대 언론 탄압과 연결해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고 밝힌 바는 없다. 아무것도 지워진 것 없는 화면의 ‘Untitled 0241029’은 “신문을 지우는 게 아니라 나를 지우는 과정”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철학과 태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 작가의 반복적인 수행의 잔상만이 남은 이 작품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뿐 아니라 신체를 활용한 감각적 경험 역시 미술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경북 상주 출신 한국 실험미술의 선두자 김구림 작가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다. 김 작가의 파격적인 행보는 최병소 작가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마른걸레로 바닥을 닦은 자리를 작품화해 비어 있는 전시장 한 켠에 붙은 김 작가의 이름을 본 최 작가는 그리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자연의 현상을 주제로 캔버스와 물감으로 표현하던 작품을 두고 일상의 재료로 눈을 돌린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린 작가가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긴 새로운 궤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외에도 신문의 상단 부분은 남기고 지워낸 작품과, 동그라미 등의 모양을 남긴 작업, 뉴욕타임즈나 타임지, 라이프지 등에서 오려낸 페이지 위에 작업한 작품 등이 소개된다. 전시는 3월 7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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