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구찌가 뎀나 바잘리아를 새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회사 케링 주가가 하루 만에 10% 폭락했다. ‘명품계 이단아’로 불리는 뎀나가 구찌를 어떻게 바꿀지 당시 시장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패션계 중론은 대체로 하나였다. “방향성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 180도로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뎀나는 올해 또 다른 방식으로 모두의 예측을 뒤엎었다. 첫 컬렉션 ‘라 파밀리아(La Famiglia)’에서 그는 기존 제품의 전통을 최대한 살리는 ‘구찌다움’을 택했다. 익숙한 ‘파괴’ 대신 ‘보존’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번 컬렉션은 반대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이 주류다. ‘뱀부 1947’ 핸드백은 78년 만에 비율을 새롭게 조율한 모습으로 다시 출시됐고, 1953년부터 이어진 구찌 아이콘 중 하나인 ‘홀스빗 로퍼’도 재등장했다. 여기에 1960년대식 빨간 코트에 구찌의 영원한 시그니처인 ‘GG 모노그램’ 캔버스 백까지. 최근 공개된 컬렉션은 ‘올드 구찌’ 요소를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왔다. 심지어 일부 아이템은 부모님의 낡은 옷장 깊숙한 곳에서 막 꺼내 든 듯한 느낌이 난다. 스테디셀러인 ‘재키백’은 장인들이 일부러 하나하나 주름을 만들어가며 오래된 듯한 느낌으로 재출시했다.
시대 아이콘을 재해석한다는 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비교를 결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뎀나는 영리하게도 평가의 시선을 ‘서사’로 집중시켰다. 앞서 클럽, 레스토랑, 교회 등에서 쇼를 열어 패션계를 긴장시켰던 뎀나다. 그러나 이번엔 런웨이 대신 프레젠테이션과 단편 영화 ‘더 타이거’를 통해 컬렉션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패션쇼의 장을 오프라인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새롭게 연 것이다.
영화는 데미 무어가 연기한 구찌 가문 상속녀 바버라 구찌가 저택에서 가족과 생일 파티를 벌이는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이야기 흐름에 새 컬렉션이 자연스럽게 소개된다. ‘파밀리아’(가족)라는 컬렉션명에서 느껴지듯 뎀나는 디자인 이미지마다 캐릭터를 부여했다. 각 캐릭터는 구찌가 추구하는 ‘페르소나’를 영상에서 재현한다. 캠페인에 속한 수많은 구찌 ‘가족’은 각각 소비자 캐릭터와 연결된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지갑을 여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행위를 넘어 ‘구찌의 내러티브’를 구매하는 경험으로 격상된다.국내 고객은 운이 좋게도 이 컬렉션을 직접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구찌는 이달 초까지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단 세 국가에서만 오프라인 팝업스토어를 열고 라 파밀리아를 현장 공개했다. 각 나라 팝업스토어 ‘대문’을 장식한 강렬한 붉은색 코트 ‘인카차타’(incazzata·분노한 여자)에는 열정적 성격의 여성상이 담겼다. 또 뱀부 1947 핸드백은 검은색 의상과 매치돼 ‘갈레리스타’(gallerista·갤러리 대표)의 주체적 스타일을 대표한다. ‘이웃집 청년’이라는 뜻의 ‘라가초 델라 포르타 아칸토’(Ragazzo Della Porta Accanto)를 보자. 가방을 들고 주머니에 무심하게 손을 넣은 평범한 모습이지만 실은 한층 꾸민 채 흠모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 있다. 혹은 비교적 복장 규제가 적은 실리콘밸리 테크 회사에 다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뎀나는 이달 공개하는 패션쇼를 앞두고 또 다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4월 출시를 앞둔 프리폴(Pre-fall) 컬렉션 ‘제너레이션 구찌’ 룩북은 촬영감독 대신 그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찍었다. 스토리텔링 너머의 구찌다움에 대해 정의를 내리려는 듯한 시도다. 이 역시 표면적으로는 구찌 아카이브를 충실히 따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숨은그림찾기처럼 디테일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기존 문법을 따르는 듯하다가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전복시키는 뎀나만의 디자인적 특성이 은근하게 녹아 있다.룩북은 구찌 하우스 아카이브에서 찾은 실크 파유 소재를 활용해 오랜 시간이 스며든 듯한 자연스러운 질감의 가벼운 테일러링 룩으로 시작한다. 단추 대신 간결히 여미는 것으로 입을 수 있는 여성 테일러드 슈트가 미니멀의 극치를 보여준다. 섬세한 실크 소재의 트래블 슈트는 파자마처럼 가벼워 보인다. 목이 반쯤 올라온 상의와 몸에 착 붙는 형태의 보디콘 가죽 재킷은 서핑복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크 및 시어링 코트는 편안한 로브를 연상케 한다. 럭셔리 제품이 단순 전시용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서 활용돼야 한다는 뎀나의 디자인 철학도 그대로다. 뒤축을 밟아 구겨 신을 수 있도록 설계된 가죽 뮬이 대표적이다.
구찌 절정기를 이룬 1990년대 톰 포드 시절에 비하면 개성이 희미해진 게 아니냐고 여겨질 때쯤 변화의 축은 제품의 실용성으로 옮겨간다. 뎀나가 새롭게 더한 디테일은 ‘가벼움’이다. 그는 옷, 신발, 가죽 가방 등 모든 제품의 우선순위가 무게를 줄이는 데 있다고 했다. 특히 자신의 작업실을 찾는 방문객에게 컬렉션 상품 무게를 재보라고 권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미국 패션 매체 WWD에서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뎀나는 “무거움과 뻣뻣함은 한 세기 전처럼 내구성의 표시가 아니다. 럭셔리는 편안함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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