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한국 미술계에서 ‘큐레이션’은 낯선 개념이었다. 이맘때 대다수 전시는 한 작가나 한 시대를 조망하는 형태에 그쳤다. 1996년 서울 인사동의 한 골목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현대인의 양상’을 주제로 25명의 작가를 모아 기획전을 진행한 갤러리 사비나(현 사비나미술관)였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이 자신의 세례명 ‘사비나’를 내걸고 문을 연 이 갤러리는 지난 30년간 입맞춤, 반려견, 교과서에 실린 그림, 셀카 등 시대성을 반영한 주제로 묶은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았다. 30년의 세월을 일수로 환산하면 1만일에 달한다. 사비나미술관은 특별전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를 통해 그간 걸어 온 길을 돌아본다. 지난 4일, 기념전 개막 행사에 참석한 이명옥 관장은 “지난 1만일의 시간 동안 사비나미술관은 스토리텔링을 더한 전시 기획과 융복합의 개념을 한국 미술계에 뿌리내려왔다”며 “시대성을 반영한 테마전은 물론, 수학이나 과학. 디지털 등 다른 분야와의 융복합을 최초로 시도하며 타 미술관과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해왔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개의 구성으로 나뉜다. 23명의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주요 전시를 비롯해 이명옥 관장과 함께 호흡해 온 작가들이 헌정한 17점의 초상화, 그간 사비나미술관이 진행해 온 기획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카이브 존이다.
첫 번째 전시 섹션에서는 43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23명의 작가가 미지의 영역인 창작 앞에서 마주하게 되는 두려움을 주제로 작업한 것들을 모았다. 특히 두려움에 맞서 끝내 작업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 작가들에 주목했다.
시대의 암울한 기억을 개인사와 함께 엮어낸 안창홍과 톨스토이 등 대문호 작가의 작품에서 자신의 회화로 번역한 양대원, 해골이나 권총 등 폭력적인 물체를 털실을 연상시키는 붓질로 표현한 함명수, 누런 포장지에 먹과 목탄 등을 올리고 수세미로 화면을 긁어내며 거친 선을 만들어내는 김명숙 작가의 작업이 소개된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에는 작가들의 조력자이자 뮤즈로 기억된 이 관장의 초상화 17점이 나와 있다. 1997년 정복수 작가가 선물한 그림부터 지난 해 작업한 작품까지 박불똥, 유근택, 김나리 등 15명의 작가의 눈에 비친 이 관장의 모습을 통해 서로에게 보내는 깊은 신뢰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관장은 “30년간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사비나미술관을 거쳐 간 작가들을 생각하며 버텼다”며 “전시를 진행한 전시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작가의 경력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기에, 그들의 커리어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미술관을 지켜왔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2000년 선보인 ‘기상청과 함께하는 일기예보전', 2002년 진행한 ’The Dog전‘, 2017년 뜨거운 관심을 받은 ’#Selfie 나를 찍는 사람들‘ 등 시대 흐름을 반영해온 사비나미술관의 역대 대표 기획전을 조망할 수 있다. 전시는 4월 19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