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후에는 규제와 여론이 벽이 됐다. 원전 사고 이후 안전 기준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노형을 상용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급격히 늘었고, 시장은 이미 표준화된 경수로 체제로 굳어졌다. 토륨 원전은 연료 주기와 재료 기술, 운영 경험이 부족해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문턱이 높다.
하지만 AI 확산으로 전력과 열 수요가 폭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토륨 기반 원전은 단순 발전소가 아니라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에 바로 붙일 수 있는 ‘현장형 에너지 허브’로서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토륨은 매장량이 우라늄보다 많고 에너지 효율이 높아 원료 조달 측면에서도 매력적이다. 또 사용후핵연료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이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핵확산 우려를 줄일 수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AI 전력난이 심해질수록 토륨 기반 MSR이 ‘산업 인프라 자산’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맞서 미국은 SFR 기반의 상용화 전략을 전면에 내세웠다. 대표 사례가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의 ‘나트륨’ 프로젝트다. 테라파워는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2024년 착공을 시작해 2030년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2026년 1분기 내 원자력 관련 핵심 부품 건설을 위한 연방 허가 확보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오며, 나트륨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앞선 차세대 원전 프로젝트로 평가받는다.
주목할 점은 미국이 차세대 원전을 단순 기술 경쟁이 아니라 ‘AI산업 인프라’로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테라파워가 메타와 최대 8기 규모의 나트륨 원전 공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빅테크가 차세대 원전의 수요처를 넘어 공급망 구축 과정까지 관여하는 ‘AI-에너지 동맹’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인프라 경쟁이 전력 인프라 경쟁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대표 기업은 두산에너빌리티다. 두산은 2026년 1분기 세계 최초의 SMR 전용 공장 착공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뉴스케일파워 등 미국 SMR 기업뿐 아니라 테라파워의 나트륨 프로젝트에 들어갈 핵심 주기기 소재 공급망에서도 두산의 역할이 거론된다. 차세대 원전 시장에서 “설계는 미국·유럽이 하더라도 물건은 한국이 만든다”는 ‘원전 파운드리’ 전략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한국은 또 다른 틈새시장도 노린다. 삼성중공업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육상형 원전보다는 선박 추진용 원자로, 부유식 원전 등 ‘해양형 MSR’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섬 지역과 해상플랜트, 해상데이터센터 같은 특수 수요를 겨냥한 것으로, 내륙형 TMSR을 앞세운 중국과 차별화된 전략이라는 평가다.
다만 한국이 토륨 기반 원전 기술 자체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하는 배경에는 정책 불확실성과 규제 장벽이 있다. 토륨 기반 MSR은 연료 주기와 재료 기술, 안전 규제체계가 기존 경수로와 다르기 때문에 대규모 투자와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 필요하다. 여론과 규제 부담이 큰 상황에서 민간 기업이 선제적으로 베팅하기 어렵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차세대 원전 경쟁은 단순한 발전 기술 경쟁이 아니라 AI산업 주도권을 둘러싼 ‘전력 패권 전쟁’으로 확장되고 있다. 중국이 토륨 기반 MSR 실증에서 한발 앞서 나갔다면, 미국은 빅테크 자본과 규제 완화 속도를 앞세워 SFR 상업화를 서두르고 있다. 한국은 독보적인 제작·공정 역량을 기반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제조 허브를 노리고 있다.
AI 인프라 경쟁이 격해질수록 원전 기술은 국가 안보와 산업 전략의 중심축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차세대 원전 분야에서 중국 미국 한국이 각각 기술 실증, 상업화 속도, 제조 역량이라는 서로 다른 무기를 들고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글로벌 에너지 패권의 향방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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