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년 전 봄, 나는 이렇게 썼다. 뉴욕이 어떤 곳인지는 길에서 소리를 질러보면 알 수 있다고. 돌아보는 이는 드물다. 뉴요커들은 웬만한 난리법석에 면역이 된 종족이기 때문이다. 무심함은 과잉의 결과다. 이 도시에선 그 무엇도 갑작스럽거나 신비롭거나 특별하지 않다. 뉴욕이 대체 뭐길래? 5번가를 따라 걷는 길, 어느 공사장에 박힌 문구가 보인다. “뉴욕은 장소가 아니야, 느낌이지.”
그 느낌은 혼돈이다. 점심은 우크라이나 식당에서, 저녁은 쿠바 음식을. 당신은 땋은 머리가 허리를 덮는 도미니칸 리퍼블릭 청년과 춤을 추거나, 봉준호 영화를 상영 중인 극장 대기줄에서 프랑스 십대들의 가십을 엿들을 수도 있다. 히잡 쓴 이란 여자가 당신을 직원으로 착각할 땐 모래색 아이쉐도우를 함께 골라주길. 그야, (미국판 올리브영인) 세포라에는 파운데이션 종류만 열다섯 가지가 넘으니까.
옷차림만 봐선 계절도 유행도 구분이 어렵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에도 여전히 반바지 차림의 러너들이 눈에 띈다. 창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방들은 다 다르게 생겼다. 취향이란 호감을 염두에 두는 영역이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라는 듯이. 천장까지 닿는 사다리 너머 도서관 같은 책장이 들어선 집을 들여다본다. 어떤 집은 주인의 국적조차 짐작 할 수 없는 기묘한 가면들이 가득하다. 어쩌다 너무 식물원 같은 거실을 마주칠 땐 실소가 터진다. ‘못 말려! 근데 여기 가정집은 맞는 거지?’
나는 뉴욕을 ‘최대’ 혹은 ‘최고’의 도시라서가 아닌 ‘최다’의 도시라서 사랑한다. 벅차도록 많은 장면은 곧 부단한 생명의 증거이기에 뭉클해지는 것이다. 미니스커트 입은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아졌음은 록펠러센터의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더 분명한 나의 자랑이다. 한번은 뉴욕에 놀러온 친구가 말했다. “나, 하이힐도 신어보고 싶고 화장도 해 보고 싶어. 여기선 뭐든지 시도해 봐도 될 것 같아서.” 그는 턱수염을 만지고 있었다. 뉴욕은 누군가의 오랜 추구미를 배반하게 만들 만큼 매콤한 구석이 있다.
미(美)를 획일화된 문화와 낭만적인 이미지만으로 무감하게 소비하는 습관도 뉴욕에 오고 나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뉴욕!’하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에는, 제이크루 반바지를 입고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는 백인 남자나, 가족사진이 놓인 오피스로 출근하는 회사원만 있지 않다. 노라 애프런과 우디 앨런이 만든 로맨틱한 영화들은 먼 추억으로 뒷걸음질 친다. 그 자리는 어딘가로부터 흘러들어온 사람들 차지다. 파키스탄에서 온 식당 종업원. 푸에트리코에서 온 청소부. 인도에서 온 서점 직원. 가나에서 온 도어맨. 뉴욕의 혈관에는 그들의 노동이 흐르고 있다.

며칠 전 택시를 탔다가 방글라데시 기사를 만났다. 이주한 지 26년째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만큼 그는 여전히 뉴욕을 찬사했다. “교통체증마저 즐겨봐. 이 정도 트래픽을 어디서 경험해보겠어!” 그는 눈에 닿는 모든 게 이 도시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키득거렸다. “뉴요커들은 불평해도 떠나지는 않아. 돌아갈 곳이 없거든! 근데 넌 어디서 왔어?” 떠나온 곳에서 고향을 발명한 사람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범퍼를 바짝 맞댄 채 전진하는 삶들. “Where are you from?” 인종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큰 이 말은 뉴욕의 보편적인 인사말이다. “어디서 왔어?” 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지만 간절함의 결은 같다.
3년 전 가을, 어느 소녀와도 이런 대화를 했다. “난 한국에서 왔어. 넌?” “난 뉴욕에서 태어났고 우리 엄마는 에콰도르에서 왔어요.” 소녀는 내가 예약한 에어비앤비를 담당하는 청소 노동자의 딸이었다. 첼시에 위치한 새 숙소의 문을 열던 날, 나는 고약한 락스 냄새와 고무장갑을 낀 성인 여자, 그리고 초등학생용 책가방을 마주쳤다. 여자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시간이 30분 정도 더 필요하다고 했다. “따님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다녀와도 될까요?” 나는 여자의 허락을 받고 아이와 거리로 나갔다.
그날은 할로윈데이였다. 거리는 스파이더맨이나 공주로 분장한 아이들이 가득했다. “넌 어떤 드레스가 갖고 싶니?” 내가 물었을 때 아이는 밤에 집에 가서 엘사 옷으로 갈아입을 거라고 했다. “캔디를 받으러 밤새 거리를 돌아다닐 거예요!” 숨 막힐 듯 기뻐진 나는 엄마의 미용실로 하교하는 열 살의 나를 떠올렸다. 앙상한 커튼 뒤에서 먹었던 김치찌개가 사실 얼마나 맛있었는지도. 노동하는 엄마 뒤에는 기다리는 딸이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 했던가.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해치우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나는 내게 종종 사탕을 쥐어주던 손님들을 기억해냈다.
1월 말, 기록적인 폭설로 뉴욕 전체가 하얗게 덮인다. 센트럴파크는 스키복 입은 사람들로 붐빈다. 그 아이도 썰매를 타고 있을까? 즐겁고 날쌘 스키와 달리 배달 자전거들은 엉금엉금 달려간다. 쌓인 눈이 골칫거리가 되어가던 어느 금요일, 나는 ICE OUT(이민세관집행국 퇴진)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청 앞으로 향한다. 그날의 지하철은 두 가지 모습이 점령했다. 스키를 든 사람들 혹은 팻말을 든 사람들. 이민 단속국 ICE는 유색인종 이민자들을 무작위로 체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한 명은 6살 여자아이 ‘르네’였다.

시민들의 구호 소리는 빌딩 숲 사이의 칼바람을 뚫고 전진한다. 내 옆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치던 이는 퇴근길의 간호사였을까, 아니면 대학생이었을까.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그들이 누구를 지키려는지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모인 2만 5천명중에 배달 기사는 얼마나 있었을까? 도어맨은. 청소 노동자는. 엄마들은. 그날은 전국적인 파업을 요구하는 자리였지만 일을 비울 수 없는 이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시민들은 슬픔에 지분을 갖는 것이 이 도시에 속하는 법이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훔친 도시에 불법인 존재는 없다” “우리는 이민자들이 필요하다” “정치의 문제가 아닌 인류애의 문제” “어떤 아이들은 하교 후 엄마가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났다는 것을 안다.”
뉴욕 출신 작가이자 이 도시의 신랄한 증언자인 프랜 레보위츠는 말했다. “미국은 더 뉴욕처럼 변해야 해요.” 그가 말하는 뉴욕은 내가 믿고 싶은 세상과도 같다. 어떤 진풍경에도 무심한 이들이 누군가의 비명에는 멈춰서는 모습 같은 것. 덩어리지지 않은 단 하나의 생명을 상상하기. 그 딸과 그 어머니와 그 아버지를 매일 마주칠 수 있는 특권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뒤뚱뒤뚱, 사람들이 얼어붙은 눈길 위를 전진한다. 알록달록한 털모자는 단 하나도 서로 닮은 것이 없어 웃음이 난다. 삐져나온 개성은 그대로, 마음은 하나로.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똑같은 마음으로 뭉친 장면은 세상을 믿고 싶게 만든다.

잡지 뉴요커는 2월 첫 주 표지를 설경 대신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노동에 헌사했다. 2월 6일 발행된 표지에는 폭설 속 배달기사들이 있다. 그 그림에서 나는 육류 공장에서 밤샘 근무하던 르네의 아버지를 본다. 십삼 년째 택배 기사로 일하는 내 아버지의 새벽도 그 그림 안에 있다. 아빠는 묻는다. “더럽고 위험한 뉴욕이 뭐가 그렇게 좋아?” 여기에 답을 적는다. 무질서는 모두를 초대했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누군가 정해둔 깨끗한 질서를 의심하는 이들이 여기 있어서. 그 모든 존재를 배워가는 게 나다워지는 일보다 더 시급하다는, 오직 그 느낌 때문에 뉴욕을 좋아한다고.


글·사진=유지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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