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승리 키워드는 ‘경제’와 ‘강한 일본’이었다. 2024년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로 세력을 키운 입헌민주당 등 야당은 불과 1년여 만에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이념적 기반이 다른 야당들이 그저 반(反)자민당 기치만 내세운 채 일자리, 물가 등에서 국민에게 호소력 있는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탓이라는 분석이다. 큰 선거에선 단순히 ‘이기는 연합’이 아니라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지향성이 유권자들에게 훨씬 중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전쟁 가능한 국가’를 향한 개헌 발의 의석까지 확보한 자민당의 우경화가 걱정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국의 고강도 위협이 자민당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 안보 지형 급변과 트럼프발 세계 질서 재편 속에서 자민당이 필요한 시기에 합당한 의제를 국민에게 던진 능력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자민당은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영향이 컸다. 당시 일본은 미 군정 체제에서 재벌이 해체되고 보수 군국주의자가 대거 척결된 상황에서 급격히 좌경화돼 가고 있었다. 일본 국민은 소련과 중공의 한반도 남하를 보며 ‘한국이 공산화하면 다음은 우리’라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마침 냉전 구도 확산을 타고 좌파 진영이 일본사회당 깃발 아래 세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합당 이전 자유당과 민주당의 노선은 많이 달랐다. 자유당은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실리’라는 요시다 독트린을 표방했다. 반면 민주당은 자유당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공격하면서 자주국방과 평화헌법 폐기를 외쳤다. 자유당이 실용적 보수였다면 민주당은 민족주의적 보수에 가까웠다. 합당을 결정적으로 압박한 것은 일본 경제계였다. “지금 같은 정치 불안으로는 경제와 산업을 키울 수 없다. 보수정당들이 하나로 뭉치지 않으면 정치 자금줄을 끊겠다”고 나선 것. 결국 자민당은 양대 정당 노선 차이를 당내 파벌이라는 형태로 내재화하며 지난 수십 년간 내부 경쟁을 통해 정권을 교대로 맡는, 세계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정치 체제를 만들어냈다. 자민당 대 야당 사이엔 ‘1.5 대 1’이라는 불균형 구도가 고착화됐다. 민주주의의 역동성 저해와 부패 구조 만연이라는 고질적 비판에도 자민당은 지난 70여 년에 걸쳐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 국제 위상 강화라는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요즘 한국의 여야 정치를 보면서 자민당식 거대 정당의 출현 가능성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강력한 1.5당이 독주하는 가운데 내부 파벌들이 권력을 교대하는 그림이다. 여야는 극심한 내홍을 겪는 중이지만 각각의 사정은 판이하다. 야당인 국민의힘은 좌우 스펙트럼의 맨 오른쪽 전선에서 노선 투쟁을 벌이고 있다. 중도 보수라는 중원은 텅 비어 있는 상태다. 그 틈새로 이재명 정부의 실용 노선이 급격히 밀려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중대재해법, 노조법(일명 노란봉투법), 재정 확대 등을 통해 노동계와 서민 대중을 고정 기지 기반으로 묶어놓은 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수용, 협력적 대일 관계, 탈원전 폐기, 실용적 내각 구성 등을 앞세워 보수 지형을 빠른 속도로 공략하고 있다. 지난해 대선후보 시절 “나는 중도 보수”라고 천명한 것이 단순히 표를 얻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던 모양새다. 실제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어서 한쪽이 극단적이면 다른 쪽이 중간지대를 차지하게 된다.
물론 이 대통령이 무풍지대를 달릴 것 같지는 않다. 더불어민주당 차기 권력을 향한 친문계 등의 때 이른 발호가 시작된 것. 집권 1년도 되지 않아 내부 다툼이 시작된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민주당의 중원 장악은 중도 실용 노선 조건에서만 가능할 것이기에 좌파적 유산이 강한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을 이반시킬 수도 있다. 대통령의 실용 노선과 이격감이 있는 민주당의 강경 노선이 절제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국힘당이 지금처럼 중원을 계속 비워놓는다면 결국 민주당의 총합은 1.5당 규모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지금 구도로는 장동혁, 한동훈 모두 리더십 한계가 뚜렷하다. 그로 인해 이번에 참패한 일본 중도개혁연합처럼 어떤 나라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최대 고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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