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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휴 극장 갈 맛 나네…'휴민트' vs '왕과 사는 남자' 쌍두마차

입력 2026-02-14 05:42  

"구교환이 출연한 '만약에 우리'와 '신의 악단' 등의 작품이 만들어 줬기 때문에 뒤에 개봉하는 영화들도 관심을 받는 것 같아요. 영화가 각자 가지고 있는 미덕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은 혼자 꽃을 피울 수 없다고 봐요. 모든 건 변하고 영화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에게 아직 볼만한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의무가 있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설 연휴 극장가에 도전장을 내민 '휴민트'의 주연 조인성이 꺼낸 말이다. 한국 영화 위기론이 공공연히 오르내리던 상황에서, 긴 침체의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흐름을 바꾼 신호탄이 조인성의 말처럼 '만약에 우리'가 입소문을 타며 250만 관객을 돌파한 것이다. 대규모 블록버스터가 아닌 감정 중심 드라마가 관객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극장은 여전히 유효한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했다.

설 연휴 극장가는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와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 2파전이 될 전망이다. 분위기는 실제 수치로도 확인된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2일 박스오피스 1위는 8만3000여 명을 동원해 매출액 점유율 35.9%를 기록한 '왕과 사는 남자'가 차지했다. 지난 4일 개봉한 이 작품의 누적 관객 수는 136만5000여 명이다. '휴민트'는 8만1000여 명을 모아 매출액 점유율 35.5%를 기록하며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다. 두 작품의 예매율은 엎치락뒤치락 하며, 차는 사실상 오차 범위에 가깝다.


가장 먼저 시동을 건 작품은 '왕과 사는 남자'다.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궤도에 안착했다. 이 작품은 조선 6대 왕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다룬 사극이지만 기존 권력 암투 중심의 사극과는 결이 다르다. 왕위를 빼앗긴 이후 인간 이홍위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장항준 감독 특유의 인간적인 유머와 따뜻한 시선이 영화 전반에 스며 있다. 무거운 역사적 배경 속에서도 인물의 온기를 놓치지 않는다. 유해진이 연기한 촌장 엄흥도는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를 유치하려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박지훈이 맡은 단종 이홍위는 궁에서 쫓겨난 뒤 삶의 의지를 잃고 광천골로 향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중심축으로 삼는다. 감시의 대상이 점차 마음을 쓰게 되는 존재로 바뀌는 과정, 삶을 포기하려던 소년이 사람들 속에서 다시 숨을 고르는 순간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올로케이션 촬영으로 구현한 청령포의 풍광, 황토로 제작한 기와와 너와집 세트 등 디테일 역시 웰메이드 사극의 면모를 갖췄다. 12세 이상 관람가라는 점도 가족 관객 유입에 유리하다.



이에 맞서는 작품은 '휴민트'다. 류승완 감독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펼쳐낸 첩보 액션물이다. 동남아 국제 범죄를 추적하던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이 정보원의 죽음을 계기로 새로운 작전에 뛰어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봉일인 지난 11일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기세를 올렸다.

조인성은 냉철함과 인간적 균열을 동시에 지닌 요원을 연기하고, 박정민은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으로 등장해 절제된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박해준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총영사 황치성 역으로 긴장감을 더하고 신세경은 생존을 위해 정보원이 되는 채선화로 분한다. 네 배우의 앙상블은 이야기의 밀도를 끌어올린다.

액션은 류승완 감독의 장기다. 맨몸 격투와 총격전, 카 체이싱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인물의 감정과 선택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라트비아 로케이션 촬영으로 구현한 차가운 도시의 질감, IMAX와 돌비 애트모스 포맷 상영은 극장에서 체험해야 할 영화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제작비 235억원이 투입된 대작으로 손익분기점은 400만명 안팎이다. 같은 시각 예매율은 31.9%, 예매 관객 19만4000여 명으로 2위를 기록했다.


가족 관객을 겨냥한 '넘버원'도 있다. '휴민트'와 같은 날 개봉한 이 작품은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숫자가 줄어들고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는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판타지 드라마다.

비밀을 혼자 짊어진 채 엄마를 피하는 아들 하민과, 아들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운함을 삼키는 엄마 은실의 감정선을 '기생충'의 모자 장혜진, 최우식이 섬세하게 그려낸다. 러닝타임 104분, 12세 이상 관람가로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예매율은 7.4%로 집계됐다.


예매율 4위 지난해 12월 31일 개봉한 박시후·정진운 주연의 '신의악단'이다. 전날 8000여 명을 모아 매출액 점유율 3.7%를 기록했다. 북한에 외화벌이를 위해 조직된 '가짜 찬양단'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누적 관객 수 115만명을 넘기며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왕과 사는 남자'와 '휴민트'의 양강 구도 속 가족 감성 드라마 '넘버원'과 중장년 관객층을 확보한 '신의악단'까지 가세하며 극장가는 다층적 선택지를 갖추게 됐다.

1월 '만약에 우리'가 살려낸 극장가의 숨결이 설 연휴를 기점으로 더 크게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 작품의 독주가 아닌 장르별 공존형 흥행이 가능하다면 이는 한국 영화계의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오랜만에 극장가에 활기가 감도는 설 연휴다. 관객의 선택이 다시 한번 한국 영화의 방향을 가늠할 전망이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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