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이 파티처럼 화려하기만 한 것도, 안개처럼 뿌옇기만 한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런던의 아침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그 투명한 슬픔을 이해한다면, 지금 와인잔에 ‘네비올로’를 따라야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자기만의 방’을 외친 모더니즘의 거장이자 페미니즘 비평의 아이콘,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23년 6월의 어느 날 아침, 상류층 부인 클라리사가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러 가는 데서 시작해 저녁에 파티가 마무리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인간 내면을 파고든 문체로,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고전이다. 1925년 출간된 이 소설은 지난해 100주년을 맞아 민음사와 문학동네 등에서 새롭게 출간됐다.클라리사는 건실하고 무던한 남편과 결혼해 아름다운 딸을 낳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50대 여성이지만, 그녀의 완벽한 일상 뒤엔 지독한 슬픔과 고독이 깔려 있다. 미래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던 발랄한 젊음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30년 전 첫사랑은, 누구보다 도발적이고 재치가 넘쳤던 옛 단짝 친구는 어딘가에서 또 다른 진부한 삶을 살고 있겠지. 과거에 대한 미련과 상념이 클라리사의 흠잡을 것 없어 보이는 삶에 그림자를 만든다. 참을 수 없는 공허를 달래기 위해 클라리사는 끊임없이 파티를 연다.
이 소설과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 품종으로 네비올로를 꼽은 건 여리여리한 색감 뒤에 단단한 맛을 숨긴 ‘반전 매력’ 때문이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서 자라는 포도인 네비올로로 만든 와인은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루비빛을 띠는 게 특징이다. 네비올로의 맑은 레드는 클라리사가 런던의 아침 거리를 걸으며 느끼는 예민하고 투명한 감각들과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네비올로가 담긴 잔을 들었을 때 처음 맡게 되는 향은 장미와 산딸기 향이다. 와인잔에 코를 깊숙이 박고 꽃내음을 맡다 보면 소설 속 클라리사가 꽃집에 들어섰을 때 수많은 꽃의 향연이 그녀를 맞이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온다.
“꽃들이 있었다. 참제비고깔, 스위트피, 라일락 다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카네이션이 있었다. 장미도, 붓꽃도 있었다. 아, 그래, 그녀는 흙냄새가 나는 화원의 달콤한 향기를 들이마시며 핌 양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에게 신세를 진 핌 양은 그녀를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민음사, 21쪽)
네비올로의 첫인상은 우아한 꽃과 과일 향이지만, 한 모금 머금는 순간 혀를 꽉 조이는 강력한 타닌과 묵직한 가죽, 타르 향이 반전으로 다가온다. 화사한 장미 향이 댈러웨이 부인의 세련된 모자와 외출복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화려한 삶이라면, 입안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대지의 느낌은 그녀가 감추고 있는 고독과 연결된다.
랑게 네비올로는 바롤로보다 상대적으로 숙성 기간도 짧고 가격도 저렴하다. 지금 바로 마셔도 충분히 아름다운 풍미를 보여준다는 게 이 와인의 장점이다. 특히 보스키스의 랑게 네비올로는 바롤로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양조되기 때문에 10만원 이하 가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미니 바롤로’라고도 불린다. 네비올로 특유의 강력한 구조감은 유지하면서도 입안에서 매끄럽게 어우러지는 질감을 가진 이 와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예민하면서도 유려한 문체와 닮았다.
파티장 한구석에서 모르는 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오히려 생의 찬란함을 느낀 클라리사처럼, 네비올로의 서늘한 타르 향과 어우러지는 화사한 장미 향에 안도감을 느껴 보라. 투명한 빛깔 속에 단단한 타닌을 숨겨둔 이 와인이 말해주듯 부서지기 쉬운 매일매일은 생각보다 견고한 뼈대로 지탱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6월의 런던 아침 공기에서 시작해 파티의 소란을 지나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나만의 방’으로 돌아온 당신에게, 피라 랑게 네비올로의 긴 여운이 다정한 악수가 돼주기를.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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