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중반 글로벌 메모리 '빅3'였던 삼성전자·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와 독일 키몬다(Qimonda)의 운명은 2008년 극명하게 갈렸다. 3~4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반도체 사이클'에서 당시는 역대 가장 힘겨운 다운 사이클 국면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불황기에 공정 전환과 원가 혁신, 대규모 투자로 버텼지만 유럽의 자존심이던 키몬다는 자본력과 국가 전략의 부재 속에 기술 상용화에 실패하며 파산했다. 인공지능(AI)으로 인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초호황을 누리는 지금의 한국 반도체 업계가 키몬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다음 불황을 기준으로 투자·연구개발(R&D)·정책 체력을 지금부터 축적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그러나 이 독일의 메모리 제왕은 불과 창업 3년 만인 2009년 파산했다. 배경에는 반도체 다운 사이클이라는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이후 전 세계 D램 산업은 대규모 증설 경쟁에 들어간 상황에서 PC·서버 시장 성장 둔화와 맞물리면서 심각한 공급 과잉이 발생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터지며 정보기술(IT) 투자와 소비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D램 가격은 제조 원가 아래로 추락한 데다 메모리 업체들은 팔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 직면했다. 당시 D램 가격은 치킨게임 경쟁 속에서 2007년 대비 85% 급락했다. 특히 512Mb급 제품은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 메모리 반도체가 대표적인 사이클 산업이라는 사실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키몬다는 심각한 재무 압박을 받기 시작해 2007년 3분기부터 2008년 4분기 누적 적자가 25억 유로까지 불어났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기술·정책 대응력의 삼각 불균형이었다. 가격 붕괴 국면에서 치열한 출혈 경쟁이 벌어지자 키몬다는 당시로서는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었던 '베리드 워드라인(Buried Wordline)'에 기반한 차세대 D램을 앞세워 경쟁력을 회복하려 했다. 베리드 워드라인은 타 회사와 달리 칩 내부의 전기선을 실리콘 내부에 묻은 다음 더 짧고 빠르게 만들어 메모리 속도를 높이고 전기를 덜 쓰게 하려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본격적인 양산 단계에 돌입하기 전이었던 탓에 키몬다는 원가 경쟁력 확보에 실패했다. 투자 여력이 고갈된 상황에서 회사는 2008년 대만과 합작으로 세운 D램 업체 이노테라(Inotera) 지분 35.6%를 마이크론에 매각해 현금을 일부 확보했지만 근본적인 체질 개선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재무 상황은 급격히 악화돼 2008년 회계연도 매출은 약 17억8500만 유로로 전년 36억800만 유로 대비 51% 감소했다. 회사는 유동성 압박과 투자 부족이 겹쳐 생산 설비와 연구개발(R&D) 조직을 축소했다. 경영진은 3000여 명의 인력 구조조정과 공장 폐쇄를 단행했으나 상황 반전에는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다운 사이클 속 삼성전자의 흑자 비결로 기술 선점 투자와 제조 원가 경쟁력 강화를 꼽는다. 불황일 때 더 투자한다는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승부수가 빛을 발한 것이다. 2008년 극심한 D램 가격 하락 국면에서도 이 전 회장은 도리어 첨단 D램 공정 전환에 더 속도를 높이며 40나노미터(nm)급 D램으로 조기 전환해 원가 개선에 성공했다. 이는 다운 사이클 기간에 경쟁사 대비 원가를 낮춰 가격 하락 압박을 흡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또 제품 다각화와 신수요 대응도 위기를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스마트폰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삼성전자는 PC용 메모리에 더해 모바일 메모리 공급을 확대하면서 포트폴리오 균형을 맞추는 등 매출 다변화를 꾀하면서 'D램 보릿고개'를 이겨냈다.
하이닉스는 재무적 여력이 삼성전자에 비해 부족했기 때문에 강도 높은 자구노력과 구조조정으로 버텼다. 고정비 절감·공정 효율화를 통해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으로 생존에 성공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두 회사 모두 공통적으로 대량 생산을 통한 단위당 고정비 분산으로 가격 하락 압박을 흡수했다"며 "시장 점유율 방어를 위해 공급을 유지하면서도 원가·효율 중심의 경쟁력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대응은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감산에 그치지 않았다는 게 공통된 평가다. 오히려 다운 사이클 국면에서도 미래 기술력 강화를 위한 투자와 공정 전환을 멈추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 점이 바로 키몬다와의 극명한 차이점"이라며 "키몬다는 금융위기 직전 충분한 금액의 전략적 R&D 투자를 지속할 자본력이 부재했고, 결과적으로 기술·제품 다양성과 경쟁력 확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당시 독일 연방정부는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핵심 전략 산업로 설정하기보다 금융위기 확대를 우려해 재정 건전성 중심의 접근을 선택했다. 그 사이 한국과 미국, 대만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와 기술 로드맵을 유지하며 다음 사이클을 준비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에 대한 독일 정부의 이해도가 부족했다"며 "국가 원수와 정부 고위급 관계자들이 기술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하는 이유"라고 짚었다.
키몬다의 몰락은 기술이 없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사이클 하강기에 버틸 자본력과 국가 차원의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독일 현지의 자체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는 HBM 초호황에 취해 있으면 안된다"며 "다음에 다가올 다운 사이클에 대비하기 위해 R&D 투자를 통한 '기술 체력'을 비축하고, 국가 로드맵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를 아우르는 10년 단위의 R&D 플랜을 명확히 세워야 하는 것은 물론 HBM, 차세대 메모리, AI·전력반도체, 첨단 패키징과 같은 미래 기술에 대한 장기·대규모 투자가 경기 변동과 무관하게 유지돼야 한다는 뜻이다. 업계 관계자는 "키몬다는 유럽 반도체의 자존심이었지만 반도체 사이클과 자본 파워, 국가 정책 부재라는 삼중 압력을 이기지 못했다"며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호황이 아니라 다가올 불황을 기준으로 전략을 짜야 한다"고 제언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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