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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은 숫자가 아니라 전략이다 [이장환 박사의 FP&A 인사이트]

입력 2026-02-13 10:13  

이 기사는 02월 13일 10:1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 칼럼에서 FP&A가 CFO의 언어가 된 이유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FP&A의 가장 핵심적인 도구인 예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 재무팀과 현업 부서는 ‘전쟁’을 치른다. 바로 ‘예산 시즌(Budget Season)’이다. 회의실마다 고성이 오가고, 엑셀 파일은 수십 가지 버전으로 증식한다. 현업은 “이 예산으로는 사업 못 한다”며 앓는 소리를 하고, 재무팀은 “회사가 어렵다”며 마른 수건을 짠다. 이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확정된 예산을 받아 든 임원들은 종종 이렇게 자조한다.

<i>“작년 예산이랑 다른 게 뭐야? 결국, 전년도 실적에 5% 더하고 뺀 거잖아. 우리 회사의 내년 전략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i>

가슴 아픈 지적이다. 많은 기업에서 예산은 ‘미래를 위한 설계도’가 아니라, 지난 과거를 답습하는 ‘행정적 요식행위’로 전락했다. 숫자는 빽빽하게 채워져 있지만, 정작 그 숫자를 움직이는 ‘전략(Strategy)’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예산이 이렇게 기계적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기업은 전략을 실행할 동력을 상실한다는 점이다. 예산은 단순히 돈을 나누어 주는 배급표가 아니다. 기업이 가진 한정된 자원(Resource)을 어디에 집중하고 무엇을 포기할지 결정하는, 숫자로 표현된 가장 강력한 전략 합의서다. 따라서 예산은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전략 그 자체여야 한다.

왜 예산이 곧 전략이어야 하는가?

FP&A(Financial Planning & Analysis) 관점에서 예산의 본질을 재정의해 보자.

첫째, 예산은 ‘전략적 선택’을 숫자로 증명하는 유일한 체계다.
경영학의 구루 마이클 포터는 “전략이란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곧 기업의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쓰지 않을지' 결정하는 용기가 전략의 핵심이라는 뜻이다. 경영진이 신년사에서 외치는 “혁신”이나 “점유율 확대” 같은 구호는 모호할 수 있다. 회사의 진짜 전략은 화려한 수사가 아닌, 엑셀 파일 속 예산 배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필자가 직접 경험했던 한 소비재 기업의 사례를 보자. 이 회사는 연초에 “프리미엄 라인업 확대를 통한 이익률 개선”을 지상 과제로 선포했다. 하지만 기업 예산 구조는 딴판이었다. R&D와 브랜드 마케팅 예산은 전년과 동일했고, 오히려 저가형 모델의 원가 절감을 위한 설비 유지보수 예산이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CEO의 입은 ‘혁신’을 말했지만, 회사의 돈은 ‘현상 유지’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략과 예산이 불일치(Misalignment)하는 순간, 그 전략은 공허한 외침이 된다. 예산은 전략을 ‘실행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당신의 예산서에 회사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돈의 크기로 반영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돈이 가지 않는 곳에 전략은 없다.

둘째, 예산은 조직 구성원의 행동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신호(Signal)다.
조직원들은 CEO의 훈시보다 자신의 부서에 배정된 예산 항목을 보고 움직인다. 예산이 어떻게 잡혀 있느냐가 곧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한 글로벌 IT 기업은 3년째 “신사업 육성”을 외쳤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원인은 예산 구조에 있었다. 신사업팀에 배정된 예산은 전체 개발비의 10%도 되지 않았고, 실패 용인(Buffer) 예산도 없었다. 반면, 기존 캐시카우 사업부에는 풍족한 예산이 배정됐다.

현장 엔지니어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회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기존 사업의 안전한 방어’임을 예산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결국 인재들은 신사업팀을 기피했고, 혁신은 멈췄다.

이후 이 기업은 FP&A 주도로 예산 배분 원칙을 뜯어고쳤다. 과감하게 기존 사업부 예산을 20% 삭감해 신사업에 몰아주고, 실패 비용까지 예산화했다. 그러자 1년 만에 조직의 공기가 바뀌었다. 예산이라는 신호등이 바뀌자 조직의 행동이 비로소 전략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예산은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방어적 전략 시스템’이다.
과거의 예산이 ‘고정된 목표(Fixed Target)’였다면, 불확실성 시대의 예산은 ‘유연한 대응 시나리오’여야 한다. 예산을 단순한 비용 통제 수단으로만 보면, 시장 환경이 변했을 때 기업은 속수무책이 된다.

원자재 가격 변동에 민감한 한 제조 기업은 매년 목표와 실적의 괴리 때문에 고통받았다. 원가가 오르면 이익 목표가 깨지고, 재무팀은 무조건적인 비용 삭감 지시를 내리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 회사는 FP&A 체계를 도입하며 ‘시나리오 기반 예산(Scenario Planning)’을 수립했다. “원자재 가격이 10% 오르면 마케팅비를 줄인다”가 아니라, “원가가 10% 오르면 제품 가격을 3% 인상하고, 20% 오르면 저수익 라인 가동을 중단한다”는 식의 대응 로직을 예산에 심어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영진은 위기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는 대신, 예산 수립 시 합의된 시나리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다. 예산은 미래를 정확히 맞추는 수정구슬이 아니라, 파도가 칠 때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하는 평형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관성 속에 매몰된 ‘죽은 예산’을 전략적 생명력을 가진 ‘살아있는 지표’로 전환하기 위해 리더는 어떤 통찰을 발휘해야 하는가?

이번 예산 심의 과정에서는 관행적인 “비용 절감(Cost-cutting)”을 지시하는 대신, 기업의 근본적인 체질과 방향성을 묻는 다음 두 가지 질문에 집중해 보길 권한다.


첫째, “우리의 핵심 전략은 예산의 어느 항목에, 얼마의 크기로 반영되어 있는가?”
둘째, “이 예산대로 집행했을 때, 우리 직원들은 과거와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가?”



이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있다면, 그 기업의 예산은 이미 숫자 이상의 가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엑셀 파일에 갇힌 숫자의 감옥일 뿐이다.

한국 기업들이여, 이제 ‘전년 대비(YoY) 몇 프로’라는 관성에서 벗어나자. 예산은 비용을 통제하는 장부가 아니다. 예산은 우리 기업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전략의 지도다. 숫자에 전략을 입히는 순간, 예산은 비로소 경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를 돕기 위해 필자가 고안한 [Dr. Lee의 FP&A 인사이트: 예산의 전략적 정렬 진단표]를 제안한다.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른 자원 배분, △조직원 행동 변화 유도, △불확실성 대응 로직의 구체성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귀사의 예산 시스템을 냉정하게 점검해 보길 바란다. 이 진단은 단순한 점검을 넘어, 개선이 필요한 지점을 정밀하게 타격하는 전략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설계도를 그렸다고 해서 항해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정교한 지도가 있더라도 예기치 못한 폭풍우(시장 변동성)를 외면한 항해는 필연적으로 침몰한다. 따라서 이어지는 세 번째 칼럼에서는 불확실성이라는 짙은 안개 속에서 실시간으로 방향을 보정해 주는 ‘Forecasting(예측)의 기술’을 다루고자 한다. 정태적 정합성을 넘어,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재무의 ‘동적 역량(Dynamic Capability)’을 심도 있게 파헤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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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Lee의 FP&A 인사이트] 예산의 전략적 정렬 진단표 (Strategic Alignment Au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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