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마라톤 완주를 즐길 만큼 건강을 자부했던 그였지만, 수술 후 1년 만에 찾아온 재발 판정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아내와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한동안 술에 의지하며 삶을 포기하려 했던 그가, 이제는 요양병원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투병의 아이콘'이 되었다. 절망의 끝에서 긍정의 힘을 길어 올린 김 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Q. 폐암 4기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처음 '4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더라고요. '왜 하필 나인가' 싶어 원망도 많이 했지요. 특히 10년 전 암으로 고생하다 먼저 떠난 아내 생각이 나서 더 괴로웠어요.
그런데 그때 아들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말하더라고요. “아버지, 제발 포기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죠. 아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그때부터였습니다.
Q. 폐암 4기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투병을 이어가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요?
무엇보다 마음을 다잡는 게 1순위예요. 저는 종교에 의지하며 기도를 많이 했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지니 몸도 반응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씩은 꼭 움직이려고 노력합니다. 마라톤을 했던 기억을 되살려, 내 몸 상태에 맞춰 조금씩 걷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거든요.
또 하나는 '식사'예요. 항암 치료를 하면 입맛이 정말 하나도 없어요. 귀신이 들린 것처럼 몸이 이상해지고 밤잠을 설치기도 하죠. 그래도 저는 '살려고' 먹었습니다. 물론 날 것은 피하고 가급적 기름기 적은 고기 위주로 음식을 가리기는 했지만 거창한 보양식은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챙겨 먹으며 기운을 냈어요. 결국 암을 이겨내는 체력은 입에서 나온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Q. 길어지는 치료 과정에서 경제적인 부분도 큰 고민이셨을 텐데요.
2020년 5월, 수술을 받은 후에 씻은 듯이 나았다면 참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재발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미 치른 수술비에 끝없이 추가되는 항암 치료비, 요양병원 비용까지 감당하려니 앞이 막막했죠. 아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었고요. 그러다 정현일 노무사님을 통해 산재 보상을 알게 됐습니다. 30년 넘게 벽돌공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했던 세월이 산재로 인정될 수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거든요.
다행히 산재 승인이 나면서 보상급여를 받게 됐고, 덕분에 지금은 돈 걱정 없이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짐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훨씬 단단해지더군요. 이제는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하게 완치를 꿈꾸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김 선생님처럼 폐암 4기 판정으로 절망에 빠진 환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사실 저도 처음엔 아내를 잃었던 기억 때문에 '나도 결국 끝이구나' 하고 문을 걸어 잠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요양병원에서 만난 이들과 서로 '고생했다' 다독이며 위로를 얻었듯, 누군가에게는 제 이야기가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됐으면 해요.
항암 치료라는 게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식사 한 끼조차 숙제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연속이지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찾아보면 산재 보상처럼 우리를 지켜줄 제도적 도움도 분명히 있고, 곁에서 손 잡아줄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투병기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는 폐암 4기 환우분들에게 '그래도 살길은 있다, 그러니 한 숟갈이라도 더 들고 버텨보자'는 따뜻한 응원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 씨의 산재 보상 절차를 자문한 노무법인 폐의 정현일 대표 노무사는 이번 사례에 대해 30년간의 장기적인 직업적 노출이 결정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정현일 노무사는 "벽돌 제조 공정 중 발생하는 미세 분진과 유해 물질에 장기간 노출된 점을 의학적 소견과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 노무사는 "폐암 4기 환자의 경우 무엇보다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며, "직업력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체계적으로 입증한다면 김 씨와 같이 산재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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