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쉰일곱 살 가을의 일이다. “나이 들면 감기도 잘 안 걸려.” “독감 예방주사는 평생 한 번밖에 맞은 적 없어.”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나는, 그해 가을 감기를 크게 앓았다. 림프선이 붓기 시작했고, ‘아,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의 세상이 노랗게 물들어 보였다. 황사가 심한 날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때 안과든 내과든 어디라도 갔어야 했다. 하지만 ‘감기가 나으면 눈도 괜찮아지겠지’ 하며 몸의 변화를 가볍게 여겼다.
몸이 안 좋다거나, 기침이 난다거나, 어지럽다는 이야기를 가족이나 요리교실 제자들, 지인들에게서 들으면 나는 늘 “빨리 병원에 가세요”, “좋은 한의사 선생님이 있어요” 하며 오지랖을 떨었다. 정작 내 일은 늘 뒤로 미뤄두면서 말이다.
시야가 노랗게 흐려진 지 이틀째 되던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침실의 스탠드와 커튼이 두 개로 보였다. 그럼에도 심각함을 깨닫지 못한 나는 커튼을 열고 연희동의 풍경을 바라보려 했다. 구름도, 해도, 마당의 나무도, 맞은편 집도 모두 겹쳐 보였다. “이게 뭐지?”
그제야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니던 안과에 예약을 하려 검색해 보니 목요일은 휴진이었다. 할 수 없이 집 근처에서 믿을 만해 보이는, 연세 지긋한 의사가 있는 안과를 찾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요리 수업도 아무 일 없는 듯 마치고, 오후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감기를 심하게 앓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던 남편에게도, 눈의 이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해주길 바랐다고 남편은 나중에 말했다. 그때 남편은 대학 시절 후배와 함께, 오랫동안 준비해 온 스코틀랜드 2주간의 위스키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내가 말했다면 책임감이 강한 그는 분명 여행을 취소했을 것이다. 사실 출발 이틀 전, 나는 이미 동네 안과에서 대학병원에 제출할 진단서를 받아 예약까지 마쳐 둔 상태였다.
“시신경에 염증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입원해서 스테로이드 치료를 받게 될 겁니다. 증상은 양안복시입니다.”
양안복시. 두 눈으로 볼 때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증상이다. 사시나 굴절 차이일 수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뇌경색이나 뇌동맥류, 중증근무력증 같은 신경계 이상도 의심할 수 있다고 했다. MRI나 CT를 통한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타고난 낙천가인 나는, 한쪽 눈을 가리면 세상이 하나로 보인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이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이른 새벽, 나는 한쪽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를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와.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연락 자주 해.” 소년처럼 들뜬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입원에 대비해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 돋보기 안경, 노트북과 필기구까지 가방에 챙겼다. 이 ‘기밀’을 털어놓은 제자 한 명의 도움을 받아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후 곧바로 신경과로 이동했고, 그날로 입원했다. MRI를 비롯해 가능한 모든 검사를 받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남편 생각이 났다. 남편의 SNS에는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행복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올라와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한마디 전해야 할까.
입원 첫날 밤, 병실에서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라니 끝까지 말하지 말까. 남편이 없어도 아들 둘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병원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사정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달려와 준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남았다.
결국 다음 날 나는, 안대를 한 채 병실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을 나의 SNS에 올렸다. 입원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남편이 봐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예상대로 스코틀랜드의 한 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로 돌아갈까?” 떨리는 듯 가느다란 목소리였다.“괜찮아. 양안복시지만 괜찮아. 제자들이랑 정훈이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끝까지 잘 즐기고 와.”
진심이었다. 교수님이 염증은 곧 가라앉겠지만 복시가 언제 정상으로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불안이 스쳤다. 그래도 사흘 뒤 퇴원했고, 남편은 예정대로 2주 후 귀국했다. 다행히 한 달쯤 지나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인생에는 몸이 변하는 순간이 있다. 내 경우는 스물 후반, 마흔 초반, 쉰다섯, 그리고 쉰일곱이었다. 젊을 때보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더 건강해졌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쉰을 넘기자 신진대사는 눈에 띄게 떨어졌고, 몸은 솔직하게 변화를 알려왔다. 서른 살 무렵, 예순은 까마득한 미래였다. 그런데 이제 곧 예순이라니, 한동안 마음이 어수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의 한 서점에서 <60세부터 새로운 나>라는 책을 충동적으로 샀다. 제목을 보는 순간, 마음속의 먹먹함이 조금 옅어졌다. 마흔아홉 살 무렵에는 오십 대가 시작되는 것이 설렜다. 진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충분히 성숙해졌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휴대전화 본인 인증 화면에서 생년월일을 스크롤하다 보면, 1967년까지 내려가기 위해 손가락을 한참 움직여야 한다. 건강하게 산다 해도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년 남짓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짧다. 아직 해보지 못한 일도, 해보고 싶은 일도 여전히 많다.

“예순이 되는 날이 오다니”라는 당혹감에서, “나이 드는 즐거움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예전처럼 무엇이든 많이 먹거나 둘이서 와인 한 병을 가볍게 비울 수는 없다. 그래도 요리하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은 놓치고 싶지 않다. 오래 만들어온 레시피를 지금의 몸 상태와 기분에 맞게 조금 바꿔본다. 재료의 조합이나 간을 살짝 바꾸는 작은 호기심만으로도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애쓰지 않기, 오래 끓이지 않기, 몸에 부담 주지 않기. 작은 변화가 귀찮음을 멀리하게 한다. 요리교실은 여든여덟 살까지 이어가고 싶다. 예순을 앞두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일은 생각보다 즐겁다.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 바람이 삶을 녹슬지 않게 한다.
오늘 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까. 그 생각을 하는 시간이 어쩌면 가장 행복하다. 함께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덕분에 우리 집 부엌의 공기는 오늘도 맑다. 다만 아들들과 함께하던 시절과는 식탁의 풍경이 달라졌다.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식사란 무엇일까. 몸에도, 시간에도 부담을 주지 않는 요리. 내가 좋아하는 레시피를 소개한다.

그린 페이스트 재료
고수잎, 이탈리아 파슬리, 셀러리 잎(기호의 향신채 또는 제철의 향신채) 70g
마늘 10g
생강 15g
청양고추 1개
갈치젓갈 2작은술
물 100ml
식용유 1큰술
돼지고기 불고기용 앞다리살 150g
우유 (또는 코코넛밀크, 아몬드밀크, 두유. 냉당고에 있는 기호의 밀크) 140ml
통영 어간장 1큰술
따뜻한 밥 적당히
토마토, 다진 파슬리 또는 고수

만들기
1. 핸드블렌더로 재료를 약 1분간 갈아 부드러운 페이스트로 만든다.
2. 냄비에 기름을 두르고 중불에 올린 뒤, 페이스트를 넣어 향이 올라오고 색이 살짝 밝아질 때까지 약 30초간 볶는다. 얇게 썬 돼지고기를 한입 크기로 잘라 넣고 섞어가며 볶는다. 고기에 페이스트가 고루 어우러지면 우유를 붓고 뚜껑을 덮어 약불에서 5분 정도 끓인다. 돼지고기가 완전히 익으면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맛을 본 뒤 부족하면 소금을 약간 더한다.
3. 그릇에 따뜻한 밥을 담고 완성된 카레를 올린다. 기호에 따라 다진 파슬리나 고수, 토마토를 곁들이면 더욱 산뜻하다.

방울토마토 300g
마늘 2쪽
올리브오일 3큰술
소금 2작은술
마스코바도 설탕 1/2~1큰술
바질잎(선택)

만들기
1. 토마토는 꼭지를 제거한 뒤 깨끗이 씻는다.
2. 마늘은 칼로 가볍게 눌러 으깬다.
3. 파스타 삶을 물을 끓이고 소금을 넣은 뒤, 포장지에 표시된 시간대로 면을 삶는다.
4. 작은 냄비에 올리브오일과 마늘을 넣고 약불에 올린다. 마늘 향이 올라오고 노릇해지면 건져낸다.
5. 4의 냄비에 토마토를 넣어 가볍게 볶은 뒤 뚜껑을 덮고 약불에서 약 8분간 끓인다. 토마토의 형태가 부드럽게 무너지기 시작하면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설탕을 더한다.
6. 삶은 파스타를 5의 냄비에 넣어 고루 버무린다.
7. 그릇에 담아 치즈를 뿌린다. 냉장고에 있다면 바질 등 허브를 곁들이면 더욱 좋다.
나카가와 히데코 요리연구가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