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1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내 최대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코리아2026이 마무리됐다. 이번 세미콘코리아에선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의 변곡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메모리는 속도 경쟁을 넘어 구조 혁신으로, 장비는 자동화와 에너지 효율 중심으로 진화하고 있다. 글로벌 장비업체와 국내 소부장 기업들은 고집적·적층과 전력반도체 등 새로운 전장을 제시하며 기술 방향성을 공유했다. 차세대 반도체 경쟁의 승부처가 공정 구조와 생태계 혁신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송재혁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는 행사에서 고객 맞춤형 HBM과 zHBM 등 새로운 메모리 구조를 공개하며 AI 최적화 전략을 강조했다. 그는 “삼성 HBM4 기술은 업계 최고”라며 “HBM4E, HBM5 등 차세대 제품에서도 1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선보인 커스텀 HBM은 GPU와의 연결 구조를 최적화해 동일 전력에서 성능을 2.8배 높인 것이 특징이다. 메모리가 일부 연산 기능까지 수행하도록 설계해 데이터 병목을 줄이고 전력 효율을 끌어올린 점도 눈길을 끌었다.
GPU 위에 HBM을 수직으로 쌓는 zHBM 역시 기존 패키징의 틀을 바꾸는 시도로 평가된다. 송 사장은 “베이스 다이 성능을 개선해 전력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며 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을 아우르는 종합 제조 역량을 기반으로 AI 시대 반도체 해법을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실리콘 포토닉스(CPO), 하이브리드 본딩 기반 초고단 적층 등도 함께 공개하며 차세대 HBM 주도권 확보에 속도를 내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SK하이닉스는 기술 난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환경 속에서 R&D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이성훈 SK하이닉스 R&D 공정 담당 부사장은 “기존 ‘인력 투입’ 중심의 R&D는 한계에 직면했다”며 “시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AI R&D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3차원(3D) D램 개발을 예로 들며 “향후 10년간 개발 난도가 대폭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AI를 활용하면 사람이 2년간 찾던 신물질 탐색 시간을 수백 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번 기조연설을 관통한 화두는 ‘AI 시대 메모리의 재정의’다. 성능 경쟁을 넘어 전력 효율, 패키징 구조, 연구개발 방식까지 전면적인 변화가 시작됐다는 의미다. 결국 메모리 산업의 승부처가 얼마나 빠른 칩을 만드느냐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얼마나 빠르게 혁신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양사가 동시에 강조했다.

세미콘 코리아 2026에서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계를 이끄는 램리서치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가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장비 경쟁의 축이 단순 미세화에서 ‘공정 자동화’와 ‘에너지 효율’, 그리고 고객사와의 공동 연구 생태계 구축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대를 맞아 장비 기술이 생산라인의 핵심 인프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다.
팀 아처 램리서치 최고경영자(CEO)는 로보틱스를 미래 장비 산업의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는 “3년 안에 램리서치가 만드는 반도체 장비의 80%에 로봇 기술을 적용할 계획”이라며 “장비 유지·보수 자동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수행하던 부품 교체와 정밀 관리 영역을 로봇이 맡게 되면 공정 오차를 줄이고 장비 가동률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램리서치가 선보인 로봇팔 ‘덱스트로’는 소모성 부품 교체 정확도가 기존 인력 대비 두 배 수준으로 알려졌다. 아처 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로봇 기반 유지·보수 기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며 “안정적인 운영이 장비 경쟁력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램리서치는 한국을 차세대 장비 혁신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계획도 공개했다. 아처 CEO는 “핵심 고객과 가까운 곳에서 신기술을 빠르게 검증하기 위해 용인에 ‘벨로시티 랩’을 설립한다”고 밝혔다. 이 연구소에서는 향후 5~10년 뒤 출시될 장비용 소재·부품을 선제적으로 개발할 예정이다. 미국 본사 외 지역에 이런 연구소를 짓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HBM 시장 확대에 맞춰 TSV 식각과 도금 장비 등 첨단 패키징 영역을 강화하는 전략도 함께 제시했다. 그는 “식각과 도금 분야에서 쌓아온 수십 년의 노하우가 차세대 메모리에서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라고 말했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는 AI 반도체 시대의 핵심 과제로 ‘에너지 효율’을 전면에 내세웠다. 케빈 모라스 마케팅 총괄 부사장은 “AI 칩의 연산량이 폭증하면서 전력 소비가 가장 큰 병목으로 떠올랐다”며 “칩 설계부터 패키징까지 전 단계에서 에너지 효율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미국 실리콘밸리 ‘에픽(EPIC) 센터’에서 공동 연구를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이다. 양사는 신규 소재 발굴과 메모리 아키텍처 고도화 연구를 통해 신제품 출시 주기를 단축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행사에서 공개된 신형 장비들도 같은 방향성을 보여준다. ‘비바(VIVA) 라디칼’ 시스템은 나노시트 표면을 옹스트롬 단위로 처리해 전류 흐름을 개선하고, ‘Sym3 Z 매그넘’ 식각 장비는 마이크로초 단위 이온 제어로 초정밀 공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 몰리브덴 기반 원자층증착(ALD) 기술은 기존 텅스텐 소재를 대체해 전력 효율과 성능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솔루션으로 주목받았다. 모라스 부사장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이 곧 AI 시대 반도체 경쟁력”이라며 “장비 혁신이 칩 성능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두 글로벌 장비 기업이 제시한 화두는 하나로 모인다. 반도체 장비의 역할이 단순 공정 수행을 넘어 생산라인의 자동화와 전력 효율, 협업 기반 혁신을 이끄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AI와 HBM 중심으로 산업 구조가 급변하는 가운데 장비업체들이 제조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칩을 얼마나 더 촘촘하게 쌓고, 얇고 균일한 막을 구현하느냐가 차세대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입니다.”
‘세미콘코리아 2026’ 행사장에는 국내 주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대거 참가해 HBM(고대역폭메모리), 3차원(3D) D램, 첨단 패키징 등 차세대 공정 변화에 대응한 신기술을 선보였다. 그동안 해외 기업 의존도가 높았던 탄화규소(SiC) 전력반도체 장비 분야에서도 국산 장비 업체들이 잇따라 도전장을 내밀며 관심을 끌었다.
올해 국내 소부장 기업 전시의 핵심 키워드는 ‘고집적·적층’이었다. 칩을 더 가까이 모으고 수직으로 쌓는 기술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본딩 장비가 주요 전장으로 떠올랐다. 한미반도체는 HBM5 이후 세대를 겨냥한 ‘와이드 TC본더’를 처음 공개했다. 차세대 HBM은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D램 칩의 물리적 면적(다이·die)이 넓어지는데, 이 장비는 넓어진 다이를 안정적으로 접합해 수율을 높이도록 설계됐다. 업계에서는 미세 본딩 기술의 방향성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세메스는 돌기(범프) 없이 칩을 직접 붙이는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을 소개했다. 삼성전자 최첨단 패키징 공정에도 적용되는 방식으로, 신호 전달 속도를 높이고 발열을 줄일 수 있는 차세대 접합 기술로 꼽힌다.
원익그룹은 HBM4와 3D D램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최신 로드맵에 맞춘 장비·소재 솔루션을 공개했다. 전공정 증착 장비에 강점을 지닌 원익IPS는 초미세 박막 형성에 특화된 제미니(GEMINI) 시리즈를 비롯해 원자층증착(ALD), 플라스마 강화 화학기상증착(PECVD) 장비를 전면에 내세웠다. 반도체 특수가스 전문업체 원익머트리얼즈는 400단 이상 차세대 낸드에 쓰일 식각 가스 육불화몰리브덴과 HBM 제조 핵심 공정인 실리콘관통전극(TSV)용 식각 가스(요오드헵타플루오라이드) 개발 계획을 공개했다.
검사 장비 업체들도 차세대 수율 경쟁에 맞춘 기술을 선보였다. 넥스틴은 3D 구조 반도체에 특화된 검사 장비 ‘아이리스(IRIS)-III’를 공개했다. 적외선(IR) 기반 비파괴 검사 방식을 적용해 기존 광학 장비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내부 결함을 탐지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펨트론 역시 특수 광학계를 활용해 HBM 웨이퍼 표면의 미세 결함을 잡아내는 검사 장비를 선보여 이목을 끌었다.
반도체 공정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른 전력반도체 분야도 주목받았다. 증착 장비 업체 테스는 SiC 박막 결정을 성장시키는 전력반도체용 CVD 장비 ‘트리온’을 앞세워 독일 엑시트론과 이탈리아 LPE 등이 주도해온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이번 행사에서는 SiC보다 낮은 전압 환경에 최적화된 질화갈륨(GaN) 전력반도체 공정 장비도 처음 공개됐다. 서동식 테스 부사장은 “반도체 기판 위에 결정 구조를 정밀하게 쌓는 에피 성장 공정에서는 두께와 도핑을 미세하게 제어하는 기술이 핵심”이라며 “글로벌 기업과 겨룰 수 있는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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