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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가져올 ESG 소비 혁명

입력 2026-03-04 08:46   수정 2026-03-04 08:48

[한경ESG] 러닝


제품 포장지에는 수많은 정보가 그림이나 글의 형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원산지, 품질 인증, 유기농 인증, 탄소발자국, 공정무역 로고 등의 제품 정보는 모두 소비자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마련된 것들이다. 예컨대 참치 통조림 포장을 잘 살펴보면 작은 돌고래 문양이 있다. 이른바 ‘돌고래 보호(Dolphin Safe)’ 마크다. 참치를 잡는 과정에서 돌고래가 그물에 걸려 희생되지 않도록 관리했다는 인증이다.

ESG 소비를 가로막는 복병 ‘선택의 피로’

사람들은 보통 착한 소비자가 되고 싶어 한다. 2025년에 <한경ESG>가 국내 소비자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ESG를 고려해 제품을 산 적이 있다’고 응답한 소비자가 27.7%였으며, ESG 제품에 추가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75.8%에 달했다.

그러나 설문 결과와 구매 행동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기업의 ESG 성과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비율은 실제로 그리 높지 않으며, 만약 그런 소비자라고 하더라도 모든 구매에서 이를 일관되게 적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가격 부담, 품질에 대한 불신, 그린워싱 우려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정보 획득과 선택의 피로’가 ESG 소비를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임은 분명하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력은 한정된 자원이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매번 기업의 지배구조를 확인하고 환경 지표를 대조하며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상당한 인지적 노동을 요구한다. 해외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가 지날수록 판단력이 20~30%가량 저하되며, 과도한 옵션 비교에 지친 뇌는 결국 노력을 최소화하는 ‘만족스러운’ 선택으로 후퇴한다고 한다.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액센추어(Accenture)에서 진행한 글로벌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온라인 쇼핑 중 옵션 과다와 피로감으로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의 구매를 포기한 경험이 있는 소비자가 74%에 달했다. 또한 온라인 플랫폼 자동 갱신 구독자 중 약 70%는 과거의 습관을 그대로 두는 소비자 관성에 따른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결국 소비자는 익숙한 브랜드나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는 ‘경로 의존성’에 빠진다. 최근 개인정보 유출과 부적절한 대응으로 공분을 샀던 쿠팡의 이용자 수나 매출이 생각만큼 크게 줄지 않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일 것이다. 복잡한 탈퇴 과정을 거쳐 ‘탈팡’을 선언한 사람도 있지만, 대체 앱을 설치하고 새로 학습하는 수고보다 기존의 ‘로켓배송’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뇌에 가해지는 피로가 훨씬 적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ESG 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린워싱을 감별하고 제대로 된 ESG 기업이나 제품을 찾아내는 과정은 ‘귀찮고 피곤한’ 일이다. 한두 번 정도야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모든 구매의사 결정을 그렇게 한다는 것은 환경이나 사회적 가치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도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AI 에이전트의 등장과 쇼핑의 변화

ESG의 마지막 퍼즐은 소비자다. 기업이 정보를 생산하고 금융이 자본을 배분해도, 결국 최종소비자의 선택이 뒤따르지 않으면 ESG 경제의 선순환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AI)은 ESG 경제의 선순환을 완성시켜 줄 결정적 열쇠가 될 수 있다.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AI 에이전트’가 소비자의 개인비서가 되어 구매의사 결정 과정의 피로를 덜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직접 정보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나의 가치관을 학습한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제품 정보를 비교해서 알맞은 상품을 추천하거나 대신 구매하는 세상이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예컨대 소비자가 AI 에이전트에게 “나는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호한다”거나 “탄소 배출량이 적고 노동과 인권이 보장된 브랜드를 골라달라”고 한 번만 설정해 두면, AI 에이전트가 수만 개의 제품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해당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제품을 추천하거나 직접 결제까지 하는 것이다.

최근 사람은 가입할 수 없고 오직 AI 에이전트들만 모여 소통하는 소셜 네트워크인 ‘몰트북(Moltbook)’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이 플랫폼의 인기를 견인한 주인공이 바로 ‘오픈클로(OpenClaw)’라는 에이전트인데, 오픈클로가 기존의 챗봇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직접 행동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용자를 대신해 전화를 걸거나 웹사이트를 탐색하며 업무를 수행한다. 자동차 딜러와 가격 협상을 진행하거나 복잡한 보험 청구 절차를 대신 처리하는 등 그동안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구매와 협상’ 단계까지 수행했다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역시 자사의 생태계를 에이전트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앤스로픽의 클로드가 선보이는 컴퓨터 유즈(Computer Use) 기능이나 오픈AI의 오퍼레이터(Operator)는 사람처럼 마우스를 움직이고 클릭하며 웹사이트를 탐색하고 결제까지 수행할 수 있다.

스스로 설정한 ESG 경로 의존성

이러한 기술은 당연히 쇼핑에도 접목될 수 있다. AI는 인간이 평생 읽어도 다 보지 못할 지속가능경영보고서나 제품의 정보, 기업의 그린워싱 논란을 다룬 뉴스 데이터를 단번에 학습할 수 있다.

AI 쇼핑 에이전트가 일반화되면, 이제 소비자는 가치소비를 위해 투입했던 수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를 고민하는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 자신이 설정한 가치관에 따라 AI가 설계한 경로만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경로 의존성은 자신의 신념을 반영한 ‘가장 쉽고 편하게 가치소비를 지속하는 길’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들면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일본의 복잡한 선거 제도가 정치적 무관심을 심화시켰다면, 한국의 사전투표제는 참여 장벽을 낮췄다. 소비도 마찬가지다. 사전투표가 투표의 장벽을 낮춘 것처럼, AI는 ESG 소비의 장벽을 낮춰줄 것이다. 유권자가 투표로 세상을 바꾸듯, 소비자가 AI라는 무기를 들고 기업을 바꾸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에 명확한 위기이자 기회다. 과거에는 실질적 ESG 성과가 낮더라도 이미지 광고나 모호한 표현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데이터 기반의 AI 에이전트 사용이 일반화되면, ESG 성과 지표가 낮은 제품은 AI의 알고리즘 필터링 단계에서 우선적으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비윤리적 기업에 대한 불매 역시 훨씬 간단하고 장기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AI 설정을 통해 차단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마케팅 역량이 부족하더라도 실질적인 데이터를 갖춘 기업은 선택받을 기회가 늘어난다. 결국 AI 에이전트는 ESG를 단순한 홍보 수단에서 실질적인 시장 생존의 필수 요건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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