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감축 산업의 탈탄소가 ‘전기국가 패권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으로 떠오르고 있다. 발전 부문을 무탄소 전력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강·석유화학 등과 같이 고온의 열과 화석연료 원료에 의존하는 산업의 공정과 원료 구조를 바꾸지 못하면 차세대 공정 표준과 글로벌 공급망 주도권을 내줄 수밖에 없다.
2일 석화 업계 등에 따르면 LG화학은 고형연료제품(SR.F·Solid Refuse Fuel)을 열분해 원료로 활용하기 위해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천억 원이 드는 전기 가열 설비 교체에 앞서, 기존 설비는 유지한 채 투입 원료를 재생 원료로 바꾸는 ‘드롭인(Drop-in)’ 방식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겠다는 전략에서다.
SRF는 종이·목재·비닐 등 가연성 폐기물을 건조, 가공해 알갱이 형태로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는 화력발전소나 산업용 보일러에서 석탄을 대체하는 ‘연료’로만 분류돼 왔다. 이를 화학 공정의 ‘원료’로 쓰려면 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석유화학 산업은 통상 원유를 정제해 만든 ‘버진(virgin) 납사’를 나프타분해시설(NCC)에 투입해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해 왔다. 최근에는 폐비닐 등을 고온에서 분해해 얻은 열분해유, 바이오 기반 납사 등 ‘재생 원료’를 기존 NCC 설비에 그대로 투입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설비를 통째로 교체하지 않아도 탄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열분해유는 폐비닐을 기체·액체 상태로 분해한 뒤 재정제해 얻는 재활용 납사다. 고품질 제품을 만들려면 깨끗하게 선별된 폐비닐이 필요하다. LG화학은 이미 선별·가공을 거친 SRF를 활용하면 정제 원유 수준의 청정성과 고순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배출 구조 자체가 이중적이다. 설비 가동을 위해 연료를 태울 때 발생하는 연소배출뿐 아니라, 화석연료 기반 원료의 화학 반응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정배출 문제까지 동시에 안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NCC의 스팀 크래킹로를 전기가열(e-cracker) 방식으로 전환하고 무탄소 전기를 사용하면 연소 배출은 사실상 ‘제로(0)’에 가깝게 만들 수 있다. 문제는 800~850℃의 고온을 대규모로, 안정적으로 전기로 구현하는 기술과 비용이다.
독일 바스프(BASF)는 2024년 사우디 사빅, 독일 산업가스 기업 린데와 함께 세계 최초로 대규모 전기 가열 스팀 크래커 시범 설비를 준공했다. 하지만 이 설비는 6메가와트(MW) 규모의 재생에너지 전기를 사용해 시간당 약 4톤의 탄화수소만 처리한다. 기존 상업용 NCC 대비 처리 능력이 3~4% 수준에 그친다. 업계가 ‘브릿지 기술’로 원료 전환을 병행하는 이유다. 전기화가 궁극적 해법이라면, 재생 원료 투입은 그 과도기를 버티기 위한 현실적 선택지다.
열분해유를 매개로 정유와 석유화학 산업의 역할 구분도 재편되고 있다. 롯데케미칼이 현대오일뱅크로부터 재활용 납사를 공급받아 여수 NCC 투입에 성공한 게 대표적이다. 열분해유는 납사 대체 원료일 뿐 아니라 지속가능항공유(SAF) 제조의 원료이기도 하다. 에스오일은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기존 정유 공정에 투입해 SAF와 저탄소 연료를 생산하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부도 석유화학 탈탄소를 단일 기술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고, 정책의 초점을 ‘원료 공급 기반 확대’로 설계하고 있다. 핵심은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지원금 체계 개편이다. 물질 재활용·화학적 재활용(열분해)·열적 재활용 가운데, 화학적 재활용에 대한 지원 단가를 더 높여 기존 소각·열회수 중심 업체들이 열분해 등으로 업종 전환하도록 유도한다는 구상이다.
폐비닐 등이 단순 연료가 아니라 석유화학 원료로 순환되도록 정책 신호를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또한 지금까지는 폐비닐 등의 ‘투입량’ 기준으로 지원금을 지급했다면, 앞으로는 열분해유 ‘생산량’ 기준으로 차등화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수율이 높은 업체일수록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되는 구조다.
업계에선 진영 자회사 한국에코에너지, 도시유전, 에코인에너지, 에코크레이션 등 열분해유 설비·기술 기업들이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유럽연합(EU) 등의 재생 원료 사용 의무 강화로 석화 업계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어서다. 한국에코에너지나 그린폴리텍, 새한리싸이클 등 실제 열분해유 제조 시설을 운영하는 경우 EPR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식용유, 팜유, 동식물성 유지 등 바이오매스로 만든 바이오 납사도 대안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핀란드 네스테가 생산한 바이오 납사를 NCC 공정에 시범 투입해 에틸렌 등의 생산 가능성을 검증했다. 다만 바이오 납사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가격 변동성과 물량 확보 불확실성이 크다. 업계는 국내 생산 설비 투자와 공급망 구축을 통한 ‘원료 내재화’를 핵심 과제로 꼽는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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