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벤처투자 제도가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등 딥테크 위주로 빠르게 재편 중인 글로벌 벤처 지형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기 투자자가 기업 상장 전까지 지속적으로 투자하면서 ‘앵커’ 역할을 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AC와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PE) 의 역할을 법적으로 구분하고 의무 투자비율을 강제하는 등 투자사의 전문성과 벤처펀드의 연속성을 깎아먹고 있다는 비판이다.
정부는 현재 AC, VC, PE에 각각 투자 의무 비율을 설정해놓고 있다. 초기 기업 투자를 유도하려는 취지지만 시장이 성숙한 지금은 오히려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막는 칸막이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AC 관계자는 “후속 투자를 못 하게 되면 창업자나 신규 투자자로부터 ‘그럴 거면 기존 지분을 정리하고 나가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며 “초기 리스크를 함께 감수한 투자자가 성장 국면에서는 스타트업과 갈등의 중심에 서야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정부가 지난해 ‘초기기업’ 범위를 3년에서 5년 이내로 확대하는 방향을 발표했지만 현장에선 무용지물이라는 평가다. 기존 투자 유치 실적이 없는 스타트업으로 제한한다는 단서 조항이 붙었기 때문이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3년을 넘긴 스타트업 가운데 외부 투자를 한 번도 받지 않은 기업은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일부 개인 투자조합에 한정된 완화라 AC가 주로 운용하는 정책자금·벤처투자조합 등 대다수 펀드에는 기존 규제가 그대로 적용된다.
AC의 지분을 이어받게 되는 VC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국내 벤처펀드의 존속기간은 7~8년(투자 4년, 회수 3~4년)이다. 만기가 다가오면 투자자는 펀드 청산 수익률을 위해 추후 성장 가능성이 남아 있는 기업의 지분도 ‘헐값’에 매각할 수밖에 없다. 한 기술 전문 벤처투자사 대표는 “기업의 히스토리와 기술력을 가장 잘 아는 건 초중기부터 함께한 투자사”라며 “데스밸리를 함께 건너고 싶어도 펀드 만기 때문에 팔아야 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반면 미국 벤처투자시장에서는 초중기 투자자가 후속 라운드에 메인 스폰서로 참여하는 구조가 자리잡았다. 미국 방산 스타트업 안두릴이 지난해 진행한 시리즈F(15억달러), 시리즈G(25억달러) 라운드는 창업 초기부터 꾸준히 돈을 댄 파운더스펀드가 주도했다. 스파크캐피털처럼 팔로온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VC도 늘어나고 있다. 세쿼이아캐피털은 아예 과거 10년 만기이던 VC 펀드를 사실상 영구적으로 굴릴 수 있는 개방형 구조로 전환했다. 초기부터 상장 이후까지 한 펀드에서 계속 투자한다.
모태펀드 자금을 받기 위해 수익률 등 단기 회수 성과에만 목매던 투자사 대상 평가 기준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투자자의 자격을 자본금이나 인력 구성 같은 형식적 요건으로 따지지만 앞으론 기술 전문성과 밸류업 역량을 더 높이 봐야 할 것”이라며 “장기적으론 전문 기술 투자사가 딥테크 영역에서 성장 기업까지 커버할 수 있게 운용 가능한 펀드 구조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해외에선 AC와 VC, 테크 전문 PE 등이 테크 스타트업에 가리지 않고 투자하면서 딜 성격이 빠르게 섞이고 있다. 미국 PE 전체 투자 규모에서 소수지분(마이너리티) 딜 비중이 18%까지 올라가면서 VC처럼 지분 일부만 사되 PE처럼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하이브리드 모델도 부상하고 있다.
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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