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카오스(대혼란)다. 트럼프 상호관세를 미국 대법원이 전격 폐기했다. 미국은 바로 ‘대체 관세’를 꺼냈고 “장난치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도 보탰다.트럼프는 미국은 왜 이리 좌충우돌하는 걸까. 얼마 전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이 궁금증에 답하는 기념비적 연설을 했다. 유서 깊은 뮌헨안보회의에서 50여 개국 정상을 청중으로 고민과 해법을 진솔하게 풀어냈다.
요약하면 이렇다. “서구 문명은 공산주의에 맞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지만 이후 어리석음과 망상에 빠져 감당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거대 복지국가에 매달리는 새 저들은 불공정한 보호주의를 방패로 산업화와 공급망 장악에 성공했다. 우리가 선택한 국제무역 시스템은 적에게 경제적 의존을 자초하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서구는 ‘우아한 몰락’(managed decline)으로 질주 중이다. 실수를 직시하고 함께 쇄신과 복원의 과업에 나서야 한다. 미국이 때로 직설적으로 상호주의를 요구하는 이유다. 유럽은 모차르트, 단테, 미켈란젤로, 비틀스의 천재성을 낳은 대륙이다. 두려움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마비된 동맹을 끝내야 한다.”
내용적으로 보면 트럼프 주장의 반복에 불과하다. 루비오 장관은 국경 통제, 기후변화, 가자지구, 베네수엘라 같은 논쟁적 주제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설 후 기립박수가 터졌다. 미국이 어디로 가는지, 세계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사적이고 웅장한 관점을 보여줘서다.
연설 키워드는 ‘우아한 몰락’이다. 외형상 괜찮아 보이지만 유럽은 예정된 붕괴로 향하고 있다고 봤다. 쇠퇴 이유로 창의성·근면성을 훼손하는 EU의 관료적 규제 시스템을 지목했다. 거대 복지국가 모델의 비효율 탓에 1990년 25%이던 유럽의 세계 GDP 점유율이 14%로 추락했다는 진단이다. 자유무역 같은 ‘규칙 기반 국제 질서’에 대한 회의도 표출했다. 교조적 시스템은 외려 자유시장경제 역동성을 파괴한다며 관세전쟁을 옹호했다. ‘제조 아웃소싱’을 통해 중국을 ‘규칙 기반 국제 질서’로 편입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었다고 단언했다.
소위 ‘글로벌리즘’에 대한 적대감도 배어났다. 루비오 장관은 대서양 동맹이 세상을 구원했으며,우리는 고귀한 문명의 상속자라고 강조했다. 모든 문화·문명의 평등을 전제하는 글로벌리즘적 시각을 배척하고 서구적 정체성의 우위를 천명한 셈이다. 글로벌리스트에 포섭된 유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국제기구는 전쟁·핵·독재 해결에 무능하며 이들에의 의존은 ‘주권 아웃소싱’이라는 게 미국의 시각이다.
사회를 억압·피억압 구조로 파악하고 ‘상대성을 절대시’하는 PC주의에 대한 반감도 뚜렷했다. 연설 상당 부분을 대량 이민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에 할애했다. 국경 통제는 증오, 혐오가 아니라 문명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적극 엄호했다. ‘무차별 이민에 유럽 문명이 소멸 중’이라던 두 달 전 미국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의 도발적 평가를 재확인한 모양새다.
이즈음 양측의 논쟁은 가히 세기적이라 할 만하다. 유럽은 뮌헨안보회의 보고서 제목을 ‘파괴 중(under destruction)’이라고 달았다. ‘질서 파괴범’으로 트럼프를 직접 지목했다. 미국은 정반대 입장이다. 유럽이 축적된 지혜와 표현의 자유 등 민주주의 핵심 가치를 ‘해체 중’이라며 다그친다.
서로 비난하고 변명하는 모습이 일견 유치해 보이고 걱정스럽지만 부럽기도 하다. 무난한 쇠퇴, 맹목적 PC주의, 퇴행적 관료주의 등 양측의 피 터지는 전선은 그대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다. 한국에선 해결 노력은커녕 문제의식조차 희미하다. 거친 매너만 보고 트럼프를 조롱하고 ‘지는 해’라며 유럽도 내려다보려는 풍조가 유행이다. 경박한 삼류정치는 그렇다치고, 지식계에서도 관련 담론이 실종이다.
한국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서구 문명의 일원이다. 연설 말미에 루비오 장관은 유럽을 ‘가평에서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까지 나란히 피를 흘린 오랜 친구’로 칭했다. 중공군으로부터 유엔군이 진지를 지켜내며 6·25전쟁 물줄기를 바꾼 ‘기적의 가평전투’를 소중한 동맹의 기억으로 소환했다. 대서양 연안의 논쟁은 분명 한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총성 없는 체제 전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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