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 속 한식’이라는 주제로 기고를 요청받았을 때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느덧 이런 글을 요청 받을 만큼 '영화 속 음식'을 오래 해왔구나 하는 마음, 그리고 100여 편이 넘는 작품 중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 질문을 붙들고 있다 보니, 지난 20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푸드팀’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할지 모른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지지만, 여전히 음식은 소품의 일부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카메라 앞에 놓이는 음식 하나에도 시대적 고증과 연출의 의도, 그리고 배우의 감정선을 담아내는 사람들이다. 시대극에서는 역사의 숨결을, 현대물에서는 캐릭터의 성격과 삶의 궤적을 접시 위에 구현한다.
이를 위해 제작, 연출, 미술팀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전체적인 배경색과 그릇의 기물까지 맞추는 세밀한 공정을 거친다. 그 치열한 다자간 미팅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촬영장에서 우리 푸드팀의 ‘요리 마술’이 시작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분투하고, 때로는 배우의 손 대역을 자처한다. 조리 과정 씬을 촬영할 때는 배우들의 조리 동선을 짜고, 완성된 음식의 형태를 관리하고, NG 후 필요한 재료를 즉각 준비하기 위해 보조 출연자임과 동시에 요리사로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다. 그로 인해 그동안 다양한 영화·드라마에서 내 손이 여러 형태로 화면에 비치기도 했다.
누군가는 내게 묻는다. "음식 감독이 따로 있어요?" 그렇다. 있다. 카메라 앞에 놓이는 음식 하나에도 시대적 고증과 연출의 의도와 배우의 감정선이 모두 담겨야 하기 때문에 전담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스크린과 밥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식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지난 20년을 기록해 본다.
이중 첫 번째 이야기로 꺼낼 작품은 최근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다. 공교롭게도 나의 데뷔작과 제목이 유사해 대본을 처음 받아 쥐었을 때 20년 전 그날처럼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영화의 첫 장면. 경복궁 사정전 안, 단종의 수라상이 차려진다. 장항준 연출감독은 크고 붉고 둥근 대원반(大圓盤) 위에 화려하되 차갑고, 풍성하지만 외로운 밥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반짝이는 유기그릇에 담겨있는 음식들을 입에 대지도 않는 단종의 모습에서, 곧 닥쳐올 비극의 예고를 예견하며 홀로 받는 밥상의 쓸쓸함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유배지 영월에서 마주한 밥상은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단조롭지만 정이 넘치는 밥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궁궐의 수라상이 완벽하되 차가웠다면, 영월의 밥상은 단순하지만 살아있었다. 그 온도의 차이를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월 장면의 밥상은 모두 강원반 위에 올렸다. 강원반은 장식이 거의 없고 구조가 단순하다. 상판이 두껍고 다리가 낮다. 그 소박함이 산간 마을의 생활과 닮아 있다. 미술, 소품팀과 함께 고민하며 영월 장면의 밥상을 모두 강원반 위에 올렸다. 대원반 위에 유기를 가지런히 늘어놓은 궁궐의 수라와, 강원반 위에 투박하게 놓인 마을 사람의 음식. 그 대비를 소반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영월의 밥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1450년대 강원도 영월의 마을 사람이 차리는 음식들은 화려할 수 없고, 구하기 어려운 것도 안 된다. 산과 강이 내어주는 것, 그리고 부뚜막에서 정성껏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극 중 단종이 영월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음식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메뉴들을 구성할 때도 다양한 고려가 있었다.
민물고기 어죽과 다슬기국은 강원도와 충청도 내륙의 강가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해 먹던 음식으로, 서강에서 손으로 건져 올릴 수 있는 다슬기는 영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식재료 중 하나였다. 이 두 음식은 이 밥상에서 국물의 온기를 담당한 영월 음식이었다.

산초 무침은 알싸하고 독특한 향이 입맛을 돋우는 무엇보다 이 밥상에서 유일하게 향이 있는 찬이었으며 토끼 저민 고기는 단백질을 위한 선택이었다. 조선 시대 강원도 산간에서 짐승 고기를 구하는 얇게 저며 간을 해서 구운 토끼 고기는 소박하지만 귀한 고기 반찬으로 밥상위에 올렸다.
산삼 뿌리는 처음에 넣을지 말지 가장 망설였던 것이다. 산삼이 너무 귀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영월 일대 깊은 산에서 산삼이 났다는 기록이 있고,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이 유배 온 어린 왕에게 가장 좋은 것을 드리고 싶었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산삼 뿌리 하나가 이 밥상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가져왔다는 마음.
산딸기는 계절이 허락한 선물이다. 단종이 영월에 머물던 시기는 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강원도 산자락에 산딸기가 붉게 익는 계절이다. 특별히 손을 댈 것도 없이, 따서 그릇에 담으면 그만이다. 소담하게 담긴 산딸기 한 줌이 이 밥상에서 유일하게 단맛을 냈다. 이 소박한 음식들이 강원반 위에서 마음으로 연결되며 사람들과 식사를 나누는 장면은,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는 숭고한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화려한 수라상보다 더 진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100여 편의 작품을 거치며 내가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음식은 단순히 시각적인 소품이 아니라 장면의 공기를 바꾸는 가장 강력한 언어라는 점이다.
이제 K-콘텐츠를 통해 전 세계가 우리 음식을 본다. 하지만 나는 화려한 음식들보다 그 속에 담긴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척박한 유배지에서도 피어났던 한식의 따뜻한 정서처럼,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 스크린 너머 우리가 열정적으로 준비하며 펼쳐내는 미디어 속 한식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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