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부와 미국 사모펀드(PEF) 엘리엇 간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 일부가 영국 법원에서 취소되면서 분쟁이 새 국면에 들어섰다. 후속 중재의 핵심 쟁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정부 행위와 엘리엇이 주장하는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얼마나 성립하느냐다. 법조계에선 유사한 쟁점으로 판정이 확정된 또 다른 PEF 메이슨 사건과 유사한 구조로 분쟁이 이어질 것으로 본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에 합병 찬성을 압박해 손해를 입었다며 2018년 7월 약 1조원 규모의 ISDS를 제기했다. PCA는 박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의 형사 유죄 판결이 확정된 점을 근거로 690억원의 배상 책임과 이자 등을 포함해 1600억여원을 인정했다. 당시 합병안에 표결한 국민연금도 국가기관으로 판단했다.
반면 영국 법원은 국민연금을 법률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국가기관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해 판정을 취소했다. ISDS는 국가의 위법 행위로 투자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 제기하는 분쟁 절차다.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PCA 판정의 전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폭스턴 판사는 "국민연금은 치안, 사법, 국방 등 핵심적인 국가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연금의 운영이 정부와 별개로 이뤄진다는 점도 지적됐다. 폭스턴 판사는 "국민연금은 한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설립됐고, 이사들도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또 "운영 비용이 국가에 의해 충당되기는 하지만 국민연금의 잉여금이 국가 자금으로 전용될 수는 없다"며 "투자 수익도 국민연금이 사용할 수 국민연금기금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메이슨 사건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고 박 전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의 책임만을 따졌다. 폭스턴 판사도 메이슨 사건을 인용하며 "엘리엇은 메이슨 사건의 청구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배상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엘리엇 사건 중재판정부가 메이슨 사건처럼 쟁점을 구체화했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엘리엇 중재 절차의 핵심도 정부의 배상 범위가 어디까지 인정되느냐가 될 전망이다. 영국 법원 역시 삼성물산 합병 당시 청와대의 조치가 부당했다는 점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는 "국가 책임과 엘리엇이 주장하는 손해액 사이의 인과관계가 얼마나 입증되느냐가 관건"이라며 "국민연금을 제외하더라도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면 기존 배상액이 유지될 가능성도 이론적으로 있다"고 분석했다.
엘리엇은 원칙적으로 영국 고등법원 판단에 대해 항소할 수 있지만 실익이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영국 법원이 국민연금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은 것은 법률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판단에 가깝다"며 "법적으로 다툴 쟁점이 좁은 데다 원중재를 제기한 지 7년 넘게 지난 점도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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