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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거래 현장에선 비슷한 대화가 되풀이되곤 한다. "계약을 먼저 이행하세요" "아니요, 당신이 먼저 해야죠" 겉보기엔 사소한 이 공방은 사실 계약의 구조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다. 약속의 '순서'를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심리전이 아니다. 법률적으로 어떤 의무가 언제 발생하고, 어떤 조건 아래에서 상대방의 청구가 정당화되는지에 관한 중요한 문제다. 계약은 신의성실이나 선의만으로 이행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법은 인간이 맺은 약속을 일정한 조건의 체계 속에 배치해 거래의 안정성과 공평을 설계한다. 누가 먼저 행동할 것인지, 상대방의 의무는 언제 성립하는지, 그 순서를 정하는 기준이 바로 조건, 그리고 그 조건을 둘러싼 법리적 구조다. 이 구조가 분명할수록 계약 당사자는 "믿느냐, 못 믿느냐"가 아니라 "어느 시점에 무엇을 이행해야 하느냐"를 기준으로 움직이게 된다.
'조건부 약속' 법리 출발점 된 판례
1773년 영국 런던의 한 비단포목상(mercer)은 자신과 함께 일하던 견습공(apprentice)과 계약을 맺었다. 1년 3개월이 지나면 자신의 사업을 견습공에게 넘기고, 견습공은 그 대가를 매달 나눠 지급하기로 약정한 것이다. 이들은 분할금 지급과 관련해 '안전하고 충분한 담보'(good and sufficient security)가 제공됐다고 인정될 것을 전제로 뒀다. 시간이 지난 뒤 견습공은 충분한 담보를 마련하지 않은 채 비단포목상에게 사업 이전을 요구했다. 비단포목상이 거절하자 견습공은 "내 담보 제공 의무와 당신의 사업 이전 의무는 서로 독립된 것"이니 비단포목상이 먼저 사업을 이전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법원의 시각은 이와 달랐다. 법원은 이 사건이 쌍방계약(bilateral contract)에서 일방의 약속이 상대방의 이행에 대한 조건이 될 수 있는 경우라고 봤다. 계약 당사자 간 약속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며, 첫 번째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면 그에 대응하는 상대방의 이행 의무는 면제된다는 논리였다. 나아가 비단포목상의 사업 이전이 견습공의 담보 제공을 조건으로 한다는 문언이 계약서에 명시돼 있지 않더라도, 당사자의 명백한 의도(evident sense and meaning of the parties)에 비춰 담보 제공이 선행돼야 한다고 해석했다. 담보 제공이 단순한 부수적 약속이 아니라 비단포목상의 사업 이전 의무를 작동시키는 전제 조건(precedent condition)이라 본 것이다. 법원은 비단포목상의 의무는 종속적 약속(dependent covenant)으로, 견습공이 안전하고 충분한 담보를 제공하지 않는 한 사업 이전을 거절할 수 있고, 그 거절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Kingston v. Preston, 99 Eng. Rep. 437, 438(K.B. 1773)).
이 판례는 훗날 조건부 약속(conditional promises)과 선이행조건(precedent condition) 이론의 출발점으로 자주 거론된다. 한쪽의 약속이 다른 쪽의 약속 이행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상호 약속은 독립된 조항이 아니라 상호 의존하는 구조(dependent promises)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특히 계약 문언에 '조건'이란 단어가 없더라도 당사자의 의도와 거래의 성격, 위험 분담의 구조를 종합해 볼 때 법이 조건을 "읽어 넣는" 경우, 즉 법정·의제조건(constructive condition, condition implied by law)을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전히 반복되는 질문…민법 536조가 제시한 답
Kingston v. Preston은 첫 번째 당사자의 약속이 그 상응하는 반대급부의 이행을 조건으로 할 수 있다는 구조를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우리 민법 제536조가 말하는 '동시 이행의 항변권' 역시 같은 축에 놓여 있다. 쌍무 계약에서 서로 대가 관계에 있는 채무는 이행상 견련관계에 있고, 원칙적으로 "네가 이행(또는 이행 제공)할 때까지 나는 내 의무를 거절할 수 있다"는 권리를 부여한다. 어떤 경우엔 한쪽의 채무가 선(先)이행적 성격을 갖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엔 양 채무가 동시에 이행돼야 하는 동시 이행 관계로 설계된다. 다만 공통된 핵심은 같다. 계약 당사자 쌍방의 의무는 서로를 전제하고 있으며, 어느 한쪽의 이행이 이뤄지지 않으면 상대방은 자신의 의무 이행을 거절하거나 지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쌍무계약에서의 이행상 견련성에 관한 민법 제536조의 태도와 나란히 놓고 볼 때 '문언에 쓰여 있지 않은 조건'까지 포함해 계약의 구조를 읽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Kingston v. Preston이 남긴 메시지는 오래된 영국 상인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투자 계약에서의 선결 조건, 주식양수도계약에서의 클로징 조건, 부동산 매매에서 잔금 지급과 소유권이전등기의 순서 등 여러 종류의 거래에서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 "누가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상대방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민법 제536조가 보장하는 동시이행 항변권은 이 질문에 대해 "쌍무계약에서 발생하는 대가적 채무는 원칙적으로 상호 간의 의무 이행을 전제로 하며, 이행상 견련관계 속에서 파악돼야 한다"고 응답한다. Kingston v. Preston이 전제 조건과 종속적 약속의 법리를 통해 계약상 의무 간의 숨은 연결고리를 드러냈다면, 우리 민법 제536조는 그 견련성을 보다 일반적인 룰로 법규화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계약의 핵심은 당사자 간의 상호 신뢰와 더불어 어떤 조건과 순서로 이 약속이 작동하도록 설계했느냐에 있다. 계약에 대한 신뢰는 말의 진정성에서 시작되지만, 그 신뢰를 끝까지 지탱해 주는 건 약속을 정교하게 엮어 놓은 계약 조건의 질서와 이행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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