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電氣)국가’(electrostate)란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다소 생소할 텐데요, 석유국가(petrostate)라는 용어와 비교해보면 감이 올 겁니다. 바로 에너지와 관련된 얘기입니다.
석유국가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인 석유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해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나라를 뜻합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쥔 데는 석유국가의 지배력이 크게 작용했어요. 이젠 전기가 그 자리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전기 먹는 하마’인 인공지능(AI) 시대가 본격화하고, 전기차·로봇·드론 등 미래 기술 집약체들이 동력원을 전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모든 게 전기로 움직이는 세상이 되면 세계는 전기국가가 주도하게 될 겁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6년 전 “중국이 석유국가(petrostate) 대신 전기국가(electrostate)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작년 중국은 최종 에너지 소비에서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30%를 넘는 세계 최초의 전기국가가 됐습니다. 소비만이 아닙니다. 태양광, 풍력, 원자력 등 청정에너지 기술로 전기를 생산하고 관련 기술을 수출하는 최강국에 오르고 있어요. 석유국가 대신 전기국가로 바로 직행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얘기를 4·5면에서 풀어보겠습니다.
'일렉트로 스테이트' 패권 경쟁 본격화

인류 역사는 에너지와 함께 발전해왔습니다. 새로운 에너지원의 등장과 활용으로 인류는 고도 정보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게 전기입니다. 전기에너지는 경제의 중추적 요소이자, 지속 성장의 관건이 됐습니다. ‘문명의 혈관’이란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은 전기화(化)의 역사
산업혁명도 본질적으로는 에너지 혁명이었습니다. 석탄을 때 증기기관을 돌린 1차 산업혁명 때부터 그랬습니다. 2차 산업혁명 이후로는 전기가 반드시 관계됐습니다. 전기에너지를 활용해 컨베이어 시스템을 돌리고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게 2차 산업혁명이었습니다. 이어 반도체·컴퓨터·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3차 혁명(디지털 혁명),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초연결과 지능화를 특징으로 하는 4차 혁명도 전기에너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막대한 전기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AI 때문에 전기 사용량이 2050년께 1000배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이미 2년 전에 나왔습니다. AI가 앞으로 범용인공지능(AGI) 등 인간 두뇌와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하면 더욱더 많은 전기에너지를 먹어 치울 겁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로봇이나 드론은 물론이고 전기자동차 등 교통과 수송 부문에서 전기화 물결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산업용 에너지도 전기로 대체
공급 측면을 살펴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석유·석탄 등 화석연료는 에너지의 원천이란 뜻에서 1차 에너지라고 부릅니다. 1차 에너지의 60% 정도는 원래 형태 그대로 교통과 난방, 산업용으로 쓰입니다. 나머지 40%는 전기 생산에 투입됩니다. 석탄·천연가스·중유를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을 통해 2차 에너지인 전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젠 전기를 난방·산업용으로 바로 쓰는 시대가 됐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수소환원제철 기술입니다. 전통적인 제철 과정은 철광석과 석탄을 고로에 집어넣고 녹이는 방식을 거칩니다. 수소환원 기술은 철광석을 고온의 수소와 반응시켜 철 성분(환원철)을 얻고, 이를 전기로에서 녹여 쇳물을 뽑아냅니다. 석탄을 하나도 쓰지 않고, 전기만 이용하는 거죠. 화석연료로 돌아가던 기계와 기관이 죄다 동력원을 전기로 바꾸고 있는 겁니다. 세계 각국의 에너지 정책도 1차 에너지의 전기화(化)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인류의 노력과도 맥이 닿습니다. 유엔은 2050년이 되면 세계 전기 생산량이 30년 전에 비해 2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합니다.
‘일렉트로 차이나’ ‘일렉트로 위안’
전기화의 흐름을 가장 앞서 이끌고 있는 나라는 중국입니다. 기존의 발전 방식(석유국가)을 답습해서는 새로운 패권 국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중국은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기술 패권의 중심이 ‘전기화’로 이동한다는 점을 간파했죠. 그래서 이코노미스트가 “석유국가 대신 전기국가로” 중국이 건너뛰려(bypass) 한다고 전한 겁니다.
석유국가(petrostate) 미국의 힘은 석유달러(petrodollar)를 통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 초 금태환제를 폐지하면서 달러가치 하락이라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협약을 맺었습니다. 미국이 사우디에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대신, 사우디는 모든 원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다른 산유국도 이를 따르면서 달러 없이는 석유를 사기 힘든 세상이 됐습니다. 달러는 세계 최고 기축통화 지위를 잃지 않았고, 미국의 세계경제 주도권은 더욱 강화됐습니다.
최근 중국은 러시아, 브라질 등과 함께 위안화나 각국의 통화로 원유 및 에너지 거래 결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중국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키우려고 합니다. 전기국가로 세계를 이끌기 시작하면 ‘일렉트로 위안’이 달러 체제에 강력한 도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기국가 전략은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2. 페트로 달러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자.
3. 석유 매장량은 아직 엄청난 규모다. 석유국가가 쇠퇴할까?
중국 질주하는데, 한국은 더딘 발걸음

중국이 처음부터 ‘전기국가’ 전략을 세운 건 아닙니다. 미국이란 석유국가 앞에서 중국의 ‘에너지 안보’를 지키기 위해 전기화(化)를 추진한 게 계기였습니다. 난방 등의 에너지원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에너지 안보 위기를 맞은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시도였죠. 마침 전기자동차, 2차전지 시대가 열리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투자가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의 전략이 맞아떨어졌습니다.
중국 청정기술, GDP의 10% 차지
전기화 기술은 탄소배출이 없는 청정에너지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광 기술로 전기를 생산하고, 2차전지 개발로 전기에너지의 실용성을 높이며, 종국에는 휴머노이드·산업용 로봇, 군사용 드론 등을 구동하는 게 모두 청정기술 기반입니다.
전기국가는 청정기술의 개발과 표준을 주도하고 관련 글로벌 산업의 지형을 바꾸는 나라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청정에너지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를 넘습니다. 이 분야의 경제성장률 기여도도 26%에 달합니다. 중국은 단순히 전기를 많이 쓰는 ‘소비자형 전기국가’가 아닙니다. 전기의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고 관련 전기화 기술을 세계시장에 공급하는 전기에너지의 허브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중국을 전기화 기술을 세계에 공급하는 ‘생산자형 전기국가’라고 규정했습니다.
“전기차만 만들어서야…”
우리나라 사정은 어떨까요? 우리나라의 청정기술 산업은 2024년 기준으로 GDP의 0.9%를 차지했습니다. GDP 비중만 따져도 중국의 10분의 1에 불과합니다. 태양광 분야에선 중국산 제품에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2차전지 기술도 우위를 자신할 수 없죠. 원자력발전 정도만 세계시장을 주도할 뿐, 나머지 청정기술에선 중국을 따라가기 버거운 형편입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시장을 보면 더욱 걱정됩니다. 전기차 내수시장은 현대차·기아 등 국내 브랜드가 약 57%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기차 충전 인프라는 모두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어요. 국내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기 중 90% 이상이 UU그린파워, 윈라인 등 중국 업체가 제작한 파워모듈을 채택 중입니다. 충전 인프라는 전력망과 연결됩니다. 전기차 충전기가 단순한 전력 공급 장치를 넘어 전력망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에너지 흐름을 조절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전기차를 충전기에 꽂아두면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을 역으로 전력망으로 전송할 수 있습니다. 전깃값이 쌀 때 차에 저장해뒀다가 비쌀 때 양방향 충방전 시스템을 통해 팔 수 있죠. 이렇게 관련 기술이 발전하는데, 우리는 중국 기술에 점점 종속되고 있는 겁니다.
이래서 선두 따라잡기가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정기술의 하나인 소형모듈원전(SMR) 시장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세계 각국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독일 정도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가 SMR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후쿠시마원전 사고의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 탈원전 주민투표까지 한 대만도 원전 발전 비중을 높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최근에야 ‘SMR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정부를 대신해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는 민간투자사업에 전력망 구축을 추가한 것도 최근의 결정입니다.
원전 이외 청정기술 중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분야 투자가 과연 우리나라 자연 지형이나 물리적 조건에 잘 들어맞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태양광·풍력은 현재 기술로는 소비가 필요할 때 능동적으로 채취하기 어렵고, 자연이 제공할 때만 가능합니다. 생산한 전기를 저장하는 문제도 있지요. 하지만 화석연료를 통한 전기에너지 생산에만 목을 매고 있을 순 없습니다. 원자력발전을 포함해 탈탄소 에너지 생산을 늘려야 하는 과제는 분명합니다. 원전 기술은 우리나라가 우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나머지 태양광 등 청정기술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시급합니다.
2. 한국이 ‘원전국가’에서 ‘전기국가’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3. 우리나라 국회는 왜 미래산업 진흥 관련법 제·개정에 굼뜰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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