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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이 이른바 ‘유로화 우회망’ 구축에 나섰다. 대외 유동성 방어망 확대, 디지털 결제망 내재화, 역내 자본시장 통합 등을 활용하면서다. 미국 달러화 중심의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절반이 달러로 결제
2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지난달 글로벌 무역 및 금융 결제에서 미국 달러화 비중은 49.68%였다. 유로화는 22.36%에 그쳤다. 준비통화로서의 위상도 비슷하다.작년 3분기 기준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외화보유액 통화구성(COFER) 데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외화보유액 중 미국 달러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56.92%를 기록했다. 유로화의 비중은 20.33%로 집계됐다.
최근 유럽 내에서 유로화 확대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치근 지정학적 파편화가 가속화되고,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관세와 금융 제재를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도구로 삼는 ‘자본의 무기화’가 확산하면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서방 진영이 러시아를 SWIFT 통신망에서 축출하고 외화보유액을 전면 동결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해당 제재에 동참했던 유럽이 통화 주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치적 결단이나 제재에 의해 경제 혈맥이 완전히 끊길 수 있는 리스크를 인식한 것이다.

이런 우려는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꼽히는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 커졌다. 지난해 11월 유럽중앙은행(ECB)이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FSR)에 따르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전체 시가총액은 2800억 달러를 초과했다.
이 중 미국 달러에 연동된 테더(USDT)가 63%, 유에스디코인(USDC)이 26%를 차지했다. 사실상 글로벌 디지털 결제 시장의 89% 이상을 미국계 자본이 장악했다.
반면 로이터통신이 보도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내부 문건에 따르면, 유로화 표시 스테이블코인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전체의 1% 미만인 것으로 확인됐다.
만약 글로벌 테크 기업과 월스트리트 자본이 결합한 미국계 플랫폼이 미래의 결제 생태계를 독점할 경우, 유럽은 통화 정책의 파급 경로마저 비유럽 민간 기업의 손에 넘겨줄 치명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에 유럽 당국은 대외 유동성, 디지털 결제망, 자본시장 통합이라는 세 가지 인프라 배관을 동시에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올 3분기부터 본격 가동되는 유럽중앙은행(ECB)의 '비유로권 중앙은행 대상 유로시스템 환매조건부채권 제도(EUREP)'의 개편이다. 2020년 팬데믹 위기 당시 소수 인접국에만 제한적으로 제공되었던 이 제도는 이제 글로벌 상설 기구로 탈바꿈한다.

유로 수요 확대 추진
가장 전략적인 변화는 '익명성 부여'다. ECB는 어느 국가의 중앙은행이 EUREP를 통해 긴급 자금을 조달했는지 개별 이용 내역을 전면 비공개로 전환하고, 주간 합산 총차입액만을 시장에 공표하기로 제도를 변경했다.이는 외화보유액 고갈이나 금융 시스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신호로 작용해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흥국 중앙은행에 유로화를 끌어다 쓸 수 있는 '그림자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달 "시장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유로화 표시 증권의 무분별한 투매를 촉발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이 백스톱 시설은 위기 시에도 유동성을 보장해 유로화의 글로벌 역할을 강력히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신흥국 중앙은행에 평상시 유럽경제지역(EEA) 국채를 대량 매입하게 만드는 유인책으로 작용한다.
디지털 결제 주권 방어를 위한 도매 금융 혁신과 핀테크 산업의 재편도 속도를 낸다. 유럽 당국은 웹3와 토큰화 금융 생태계에서 미국 테크 기업에 결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길 것을 경계하며, 차세대 디지털 도매 금융 결제 인프라를 직접 설계하고 있다. 피에로 치폴로네 유럽중앙은행 집행이사는 "우리가 우리 돈에 대한 통제권을 잃으면 경제적 운명에 대한 통제권도 잃게 된다"고 밝혔다.
올 3분기 도매 결제망 '폰테스'가 나온다. 라틴어로 '다리'를 뜻하는 폰테스는 기존 유로시스템의 안정적인 공적 결제망인 타깃 서비스와 시장의 민간 플랫폼을 상호 연결하는 핵심 중재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상업 은행과 자산 운용사들은 토큰화된 채권이나 디지털 자산을 거래할 때, 불확실한 사설 스테이블코인이 아닌 무위험 중앙은행 화폐(CeBM)로 안전하고 즉각적인 동시결제(DvP)를 완료할 수 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CB는 디지털 유로 도입에 따른 유럽 연합 은행권의 시스템 구축 및 운영 비용을 향후 4년간 약 40억~60억 유로로 추산했다.
EU는 자본의 동맥경화와 국부 유출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시장동맹(CMU)을 '저축투자연합'이라는 입법 패키지로 격상했다. 국경을 초월한 규제 장벽을 철폐하는 시장통합 및 감독 패키지와 은행 대출 자산의 증권화가 핵심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우리는 은행 계좌에 잠자고 있는 저축을 더 생산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6월까지 저축투자연합의 첫 단계를 완료하기로 합의했다"며 "충분한 진전이 없다면 참여국끼리의 강화된 협력을 고려할 것"이라며 밝혔다.
유로화 지나친 확산도 문제
EU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우려도 있다. '강한 유로의 역설' 문제가 대표적이다. 유럽의 계획대로 전 세계 중앙은행과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EUREP 담보용 또는 디지털 결제 수단으로 유로화 자산을 경쟁적으로 매집하게 될 경우, 유로화의 가치는 펀더멘털을 초과해 구조적인 강세 압력을 받게 된다.유로화 환율의 지속적인 강세는 대외 무역과 수출을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 등 유로존 주요국의 제조업체에 글로벌 가격 경쟁력 상실의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질 모엑 악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로이터 칼럼에서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의 글로벌 역할 업그레이드 지원과 내부 통화정책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통화 주권을 지키려다 오히려 실물 경제의 근간을 훼손하고 인플레이션 우려로 이어지는 이른바 '트리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럽 내부의 불완전한 정치적 통합과 재정 정책의 파편화도 문제로 꼽힌다. 재정 건전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이른바 '검소한 국가'들은 자국 납세자의 자본으로 타국의 방만한 부채 리스크를 떠안는 재정 통합에 반대하기 쉽다.
경제 위기 발생 시 최종적인 채무 상환 손실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유로화 채권 시장이 30조 달러 규모의 미 국채 시장이 제공하는 무한한 신뢰를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달러가 지난 80년간 구축해 놓은 글로벌 '네트워크 효과'와 그림자 금융 시장의 장벽을 단숨에 허물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글로벌 원자재 결제와 국경 간 은행 대출의 압도적 다수가 여전히 달러화로 이루어지고 있다.
비은행 금융기관과 외환(FX) 스와프 시장에 얽혀 있는 수십조 달러 규모의 파생상품은 위기 시 막대한 달러 수요를 기계적으로 창출한다. 위기 상황이 발생하여 만기를 연장해야 할 때 전 세계 금융기관들이 맹렬하게 달러를 사들이는 '달러 스크램블' 현상은 유로화 인프라 혁신만으로 단번에 진화되기 어렵다.
대외 무역 의존도와 자본 시장 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금융 당국과 수출 기업은 단기적인 환율 등락이나 미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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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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