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2년 1월의 어느 겨울 저녁.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툴라 지방의 한 기차역에서 30대 여성 안나 피로고바가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졌다. 연인 알렉산더 비비코프가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자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었다.
지역 신문에 실린 이 사건은 인근에 살던 러시아 문학의 거장 레오 톨스토이에게도 전해졌다. 그의 아내 소피아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당시 처참한 사건 현장에 다녀온 뒤 큰 충격에 빠졌다. 그로부터 2년 뒤, 강렬하고도 고통스러운 톨스토이의 기억은 불멸의 고전 소설 <안나 카레니나>로 되살아났다.
19세기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당시 귀족 사회에서 만연했던 불륜을 소재로 다룬다. 고위 관료 알렉세이 카레닌의 아내로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안나는 어느 날 젊고 매력적인 장교 알렉세이 브론스키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안나는 아들 세료자마저 남겨두고 브론스키와 함께 떠난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사랑도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브론스키의 관심은 점점 시들해지고, 기댈 곳 없는 안나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홀로 견디다 끝내 기차역 아래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브론스키를 처음 만났던 그 기차역에서다.
백미는 2막이 끝날 무렵 울려 퍼지는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다. 오페라 가수 패티 역을 맡은 실제 성악가(한경미·강혜정)가 애절한 목소리로 고음을 터뜨릴 땐 객석에서 일순간 숨이 멎는다. 이 노래에 맞춰 모든 고통을 초월한 듯 엷은 미소로 눈물짓는 옥주현의 표정 연기는 오페라글라스를 집어 들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러시아 귀족 사회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는 무대 연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폴란드 민속춤 ‘마주르카’와 왈츠가 어우러진 무도회장에선 19세기 사교계의 우아함이 펼쳐지고,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지나가는 배경에 그쳤던 스케이트장은 역동적인 군무가 태어나는 장소로 거듭난다. 무대는 LED 화면으로 채워져 시각적으로 풍부했지만, 정교한 세트 활용을 기대하는 관객에겐 아쉽게 느껴질 수 있다.
작품은 불륜을 저지른 안나를 단죄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모든 걸 버렸지만 재만 남은 사랑 앞에 좌절하고 무너져 가는 한 인간의 삶을 그저 담담히 따라갈 뿐이다. 톨스토이의 가치관을 반영한 캐릭터, 레빈의 사랑 이야기를 안나의 서사와 비교해 보는 것도 관람 포인트다.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