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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끌어안은 여자가 다시 우리를 본다…故박영숙 사진전

입력 2026-03-03 09:22   수정 2026-03-03 09:23

“여자가 베개를 끌어안고 초점 없는 눈으로 서 있는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해요.”

2006년 1월, 사진작가 박영숙(1941~2025)이 작업실에서 했던 말이 또렷이 기억났다. 그가 언급한 작품은 1999년 '미친년 프로젝트'에 출품했던 <미친년들 #1>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사진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다시 관람객과 마주하고 있다.

20대 초반, 혈기 어린 대학생으로 그를 만났던 기억을 더듬는다. 시간이 흘러 온갖 여성의 역할을 경험한 뒤 다시 마주한 여러 작품들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세기말, 페미니스트 사진작가로 산다는 것의 무게. 여성 해방을 향한 그의 열망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남기는 씁쓸함. 사진 속 인물들의 응시는 그 간극을 묵묵히 건너온 시간의 증언처럼 묵직했기 때문이다.



전시장 벽에 걸린 <미친년들 #1> 속 여성은 감정의 폭발 대신 정지된 긴장을 택한다. 한때 도발로 읽히던 장면은 이제 한국 현대사진사 안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 '미친년'이라는 멸칭을 전면에 내세워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시각 언어로 치환했던 박영숙 작가의 시도는 1990년대 말 한국 미술계에선 드물었던, 직접적인 페미니즘 선언이기도 했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2월 25일부터 선보이고 있는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는 작가의 별세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다. 전시는 1960년대 초기 작업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를 아우르며, 박영숙이 어떻게 여성의 이미지를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재구성해왔는지를 추적한다.



지하 1층과 1층에는 1999년 이후의 작업이 집중 배치됐다. '미친년' 연작은 여성의 욕망과 광기를 병리화해온 사회적 언어를 역이용한다. 작가는 낙인을 제거하는 대신 그대로 호출해 의미를 전복한다. 김혜순 시인의 시 <꽃이 그녀를 흔들다>에서 제목을 빌려온 작업 역시 연약함의 상징으로 소비되던 '꽃'을 생명과 생성의 힘으로 재해석했다. 여성성을 둘러싼 상징 체계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발걸음을 옮기면, 욕망과 열정의 방향으로 또렷이 서 있는 여성의 전신, <내 안의 마녀>가 시선을 붙든다. 생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엔 욕망과 열정을 좇아 사는 여성을 마녀라 불렀죠. 저는 그것을 뒤집고 싶었어요. 여자들이 솟아오른 욕망을 감추지 않았으면 해서요."



3층에는 1960~1980년대 작업이 놓였다. 이 시기는 훗날 '미친년'과 '마녀' 시리즈로 구체화될 문제의식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1988년 발표한 포토콜라주 <마녀>는 김혜순의 시 <그곳 2 - 마녀 화형식>에 대한 시각적 응답이다. 서구의 마녀 화형 이미지를 차용하고 인화지를 병치한 구성은 사진을 기록의 매체에서 상징적 구조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작업을 기점으로 박영숙은 다큐멘터리적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의 신체와 이미지를 사회적 언어와 충돌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1963~1967년, 작가가 20대에 찍은 흑백 사진 역시 중요한 단서다. 거리와 인물을 담은 화면에는 아직 직접적인 선언은 없지만, 규범의 주변부를 응시하는 태도가 이미 자리한다. 이후 작품들의 급진성은 이 시기의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미친년'과 '마녀'라는 단어가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이 작품의 동시성을 강화한다. 여성의 욕망을 어떻게 명명해왔는지, 탈규범적 존재를 어떤 언어로 묶어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박영숙의 사진은 그 질문을 다시 현재로 호출한다. 전시는 4월 18일까지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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