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의 화약고가 터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본토 공습에 맞서 이란이 걸프 지역 에너지 핵심 인프라를 정밀 타격하며 전 세계 공급망을 인질로 잡았다.
단순한 보복을 넘어 글로벌 경제의 핏줄을 끊겠다는 이란의 '에너지 인질극'에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아람코·카타르 LNG 시설 피격에 가동 중단…유가 13%·가스값 46% 폭등
지난 2일(현지 시간) 이란의 자폭 드론이 카타르의 핵심 액화천연가스(LNG) 생산지인 라스라판과 메사이드 발전소를 강타했다.
국영 기업 카타르에너지(QE)가 즉각 생산 중단을 선언하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이날 네덜란드 TTF 거래소의 천연가스 선물 가격은 1㎿h당 46.52유로로 전일 대비 46% 폭등했다.
동북아시아 LNG 가격 지표인 JKM(Japan Korea Marker) 역시 100만BTU당 15.068달러로 40% 치솟으며 글로벌 에너지 대란의 서막을 알렸다.
피해는 가스에만 그치지 않았다. 로이터·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의 핵심 정유 시설인 라스 타누라와 중국 시노펙 지분이 37.5% 섞인 야스레프(YASREF) 정유소도 드론 공격을 받아 가동이 중단됐다. 쿠웨이트 아흐마디 정유 시설에서도 드론 격추 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걸프 전역이 전쟁터로 변했다.
주요 생산 시설이 동시다발적으로 마비되면서 국제 유가는 요동쳤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에서 북해 브렌트유 선물은 개장 직후 13% 급등하며 배럴당 82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지난해 1월 이후 최고치로, 공급망 원천 타격에 대한 시장의 극심한 공포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호르무즈 봉쇄보다 치명적, 美 우방국에 경제적 고통 전가
이란은 걸프 국가들의 에너지 시설을 초토화하면서도 정작 군 관계자를 통해 “역내 국가 정유 시설은 작전 목표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모든 미국과 이스라엘 자산만 적법한 목표물”이라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정면충돌에 따른 공멸은 피하면서 우방국을 압박해 상대 진영의 결속력을 약화하는 '고도의 ‘회색지대 전략'으로 해석하고 있다.
핵심은 미국 우방국을 흔드는 데 있다. 사우디·카타르 등 미군 기지를 수용한 걸프 국가들을 압박해 '미국 편에 서면 경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이들이 미국에 확전 자제를 요구하도록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 전면 봉쇄 같은 초강수 대신 정유·저장 시설을 정밀 타격해 복구에 시간이 걸리는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실질적 경제 타격을 노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제사회의 전면적 반발은 피하면서도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무기 삼아 서방의 민심을 악화시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동력을 내부에서부터 꺾겠다는 계산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호르무즈 해협의 물리적 봉쇄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해협이 열려 있어도 배에 실을 원유와 가스가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핵심 생산 기지가 멈춰 서면서 공급망의 '입구'가 아닌 '원천'이 봉쇄되는 격이다. 에너지 분석업체 우드 매켄지는 "공급 차질이 아시아와 유럽 간의 물량 확보 경쟁에 다시 불을 붙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공습 이후 인근 해상 피격으로 선박 보험료가 폭등해 선주들이 운항을 포기하는 사실상 봉쇄 상태다. 민간 선박의 진입이 극도로 위축된 상태다.
이란이 우방인 중국의 자산까지 포함된 시설을 공격하는 무리수를 둔 배경에는 러시아와의 밀착이 있다. 이란은 우크라이나 전장에 '샤헤드(Shahed)-136' 드론을 공급한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최신예 수호이(Su)-35S 전투기 48대(60억 달러 규모)를 인도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6년부터 도입되는 Su-35S는 전자전 장비인 ‘키비니-M’과 F-35 탐지용 레이더를 갖춘 4.5세대 전투기로, 노후화한 이란 공군의 현대화를 이끌 핵심 전력이다.

난리 통에 굿도 보고 떡도 먹는 푸틴
이 와중에 러시아는 공급 차질에 따른 유가·가스값 폭등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충당하는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3일 러시아산 우랄유 가격은 전일 대비 1.96% 상승한 배럴당 58.94달러를 기록하며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서방 제재로 브렌트유 대비 배럴당 15달러 수준의 높은 할인율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중동발 공급 차질로 인한 국제유가 상승은 러시아의 주요 수입원인 원유 및 가스 수출 단가를 높여 러시아의 세수 증대로 직결된다.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러시아 국부펀드 대표이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경제특사인 키릴 드미트리예프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지난 2월 28일 엑스(X·옛 트위터)에 "유가가 곧 배럴당 100달러를 넘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러시아 국영TV 진행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는 "(이란 공습이) 우리 예산에 커다란 이득"이라며 "트럼프(미국 대통령)가 이란 유전을 공격한다면 우리가 남은 소수의 석유 생산국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중국향 수출에 대해 배럴당 15달러 할인을 제공하며 시장 점유율을 독식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러시아 밀착은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2024년 기준 러시아 원유 수출량의 34%를 인도가, 26%를 중국이 사들인 상황에서 중동 공급망이 마비되면 이들이 육로를 통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대폭 늘릴 것으로 관측된다.

유가 150달러 전망도…韓, 경제 비상
중동 의존도가 높은 한국 산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한국은 원유의 약 70%, LNG의 약 2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수출이 경제를 지탱하는 한국은 제조 원가 상승과 글로벌 소비 위축이라는 이중고에 처해 타 국가보다 훨씬 치명적인 수출 경쟁력 약화에 직면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하면 70달러 수준인 브렌트유 기준으로 배럴당 120달러에서 최고 15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부는 2일 오후 김민석 국무총리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고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이형일 기재부 1차관은 "금융시장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시장 달래기에 나섰다. 문신학 산업부 차관도 "원유 208일분을 비축 중이며, 카타르산 LNG 비중이 20%로 낮아진 데다 봄철 수요 감소기라 수급은 걱정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ING 등 주요 투자은행은 사태 장기화 시 유럽 가스값이 현재의 두 배인 100유로까지 치솟을 것으로 본다. 유가·가스값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수출 경쟁력 악화는 비축유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고유가·고환율·물가 상승이라는 '트리플 악재'에 따른 무역수지 악화와 경기 침체 우려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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