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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파트 도시에서는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까?

입력 2026-03-10 17:49   수정 2026-03-10 18:06

‘시간을 측정하는 새로운 단위를 갖고 싶다, 숫자가 아닌.’

거실로 나가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창이 있는 곳은 원래 발코니였던 공간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건 20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같은 아파트 다른 동의 평평한 입면이다. 해는 보이지 않는다. 얼마만큼 기울어졌는지 또 얼마나 높은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 시쯤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을 때 의식처럼 시계를 가장 먼저 풀어 놓는다. 시간을 잊는 것, 그게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시간을 잊으려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라 말하는 것이 명상 가이드이든 자기관리든 간에 그 ‘지금 여기’가 지칭하는 것은 공간이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내 존재의 처소여야 한다. 공간을 인식하기 위한 감각 중 인간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청각이다. 시청각을 통해 무언가를 전해야만 하는 영상을 만드는 일을 오랫동안 하며 내린 결론이다.

내가 앰프의 전원을 켜고 음악을 고르고 있을 때 천장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말을 건다. 이 근처에 지하보도를 새로 만드는 일에 동의하라는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목소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말을 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한 남자가 갑자기 소멸해 버린 땅 밑으로 사라져 버린 사건이 떠오르고, 그 일이 일어난 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난다. 그 사건은 땅을 파는 일 때문에 발생했다.

“아파트에서 온갖 기술적 편리를 누리며 살다 보니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병리학적 표현을 아무런 제약 없이 하게 된 것이다.”
- J. G. 밸러드, <하이-라이즈>,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2012

그 목소리에 쫓기듯 나와서는 한강으로 연결되는 작은 천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걷는다. 하지만 이 수변 공간에서도 시간과 계절을 느끼긴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풀이 자라나면 허연 두피가 들여다보이는 젊은 군인의 머리처럼 삭발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고개를 올려보니 5킬로미터가량 이어지는 양쪽에는 같은 설계도를 바탕으로 지어 올린 듯한 수직 도시의 대열이다. 평평하게 솟아오른 직사각형의 건물들에는 외부로 돌출된 계단 공간도 발코니도 없어 햇빛을 받아내며 빛과 그림자의 사선을 만들어내는 그런 구석이 조금도 없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오랑’이라는 도시를 묘사하며 ‘말하자면 시장에서 파는 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곳에서도 그나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건 마트에서 파는 과일의 종류다. 유명한 건축 공간을 답사하다 보면 하얀 캔버스가 되어버린 거대한 콘크리트 벽,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만든 그림이 건축적 클리셰 같을 때가 있지만 때로는 조금 작을지라도 그런 클리셰가 가까운 곳에 하나쯤은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어렸을 때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SF 영화들을 좋아했었다. 가끔 그 영화 속의 도시와 공간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먼 미래 같은데, 시대 설정을 따져보면 바로 지금이 그 영화들이 경고했던 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의 배경인 2019년은 이미 과거다. 그 시절 그 영화들이 두려워했던 미래는 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살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곳이 그런 디스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유토피아의 외피를 뒤집어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곪아 터져 나온 디스토피아의 악취를 풍기는 밸러드의 세계, 바로 그 세계인 것은 아닐까?

밸러드 풍의 몽상이 피어나는 공간, 바비칸

런던에 처음으로 가면서 바비칸역 근처에 숙소를 얻게 된 건 행운이었다. 창문을 열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발코니의 실루엣이 언제나 보였기 때문이다. 근처를 배회할 때마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콘크리트의 발코니들이 마치 식별을 위한 인장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맑은 저녁 햇살 속에서 층층이 솟아오른 발코니들, 그리고 난간 뒤의 화분 안에서 잘 자라고 있는 식물들에 이르기까지.
- J. G. 밸러드 , <하이-라이즈>,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2012

‘여기서부터 바비칸’ 같은 팻말은 없다. 숙소를 나와 길을 건너 완만한 경사의 넓은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니 바비칸역에서 내부 광장으로 연결되는 하이웨이다. 여기서 더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온실과 갤러리, 도서관 등이 있는 문화시설로 바로 연결이 된다. 주거 동의 간격이 넓어 이들 사이에 있는 공간을 보행로라 해야 할지 광장이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주거 동의 이름도 숫자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또 그의 작품에서 가져온 이름들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바비칸 구역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또 보행로와 계단이 이리저리 얽혀 있고 어느 방면으로 가든 같은 구조가 반복되기에 잘 모르고 들어섰다가는 길을 잃을 것만 같다.




이곳을 방문한 날은 비가 왔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콘크리트 타워와 그 사이로 반복되는 웅장한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를 헤매다 보니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SF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 구조물에 압도당하는 감각과 그 삭막한 풍경 위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편 상상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설렘,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일었다.

이야기를 이끄는 건 인물이지만 그들이 머무는 무대장치, 즉 공간이 없다면 이야기는 흘러갈 곳을 잃은 물줄기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다.

밸러드의 소설 <하이-라이즈>는 공식적으로는 런던의 다른 브루탈리즘 건축인 트렐렉 타워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졌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여러 부분에서 바비칸을 참고한 것은 아닐까 싶은 부분이 많다. 바비칸은 완공 전부터 일명 바비칸 전투라 일컬어지는 노동조합과의 분쟁, 10년 넘게 이어진 공사 등으로 이미 화제였다. 더 높고 화려하게 솟아오른 건물들 사이에 있는 지금의 바비칸과 달리 1960~70년대의 런던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에게 이 한 편의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꿈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주는 달콤함 때문에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그런 꿈은 그 꿈을 불러일으킬 공간이 필요하다. 콘서트홀과 갤러리 등이 모여있는 바비칸 센터의 주 출입구로 들어서니 그런 꿈속으로 초대받은 주인공이 된 듯했다. 외부에서 느껴졌던 야수성은 이곳에서 돌연 사라져 버리고 문득 환영받는 기분이었다.



브루탈리즘의 핵심은 무엇일까? 외부로 드러난 거친 콘크리트의 질감과 볼륨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콘크리트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무언가를 담아내는 캔버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공간의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샤갈의 그림에서 파란색이 환하게 빛나게 하기 위해 어두운 색이 더 많이 칠해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비칸 센터의 실내 공간은 매우 어둡다. 외부에서 보았던 거대한 콘크리트의 기둥이 여전히 내부에서도 천장을 받치고 있고, 내장재들의 색깔도 대체로 어둡다. 그런데 공간을 걷다 보면 그 사이사이에서 유독 빛을 내는듯한 오렌지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채가 구석구석에 등장한다. 콘크리트 기둥과 계단, 그리고 2층의 보행로 등이 프레임을 형성하며 프로시니엄 효과가 일어난다. 그 효과에 이끌려 자꾸만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이리저리 이 공간을 구석구석 탐닉하다 보니, 어느덧 도서관 입구 앞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몸을 돌리면 미술과 건축, 영화 등 아트 분야의 책들이 있고 그 사이로 기다란 책상과 도서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는 난간 앞, 좁은 서가 사이에 몸을 깊숙이 숨길 수 있는 갈색 소파가 있다. 꽤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들 집중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어 함부로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을 찍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곳에 앉아 책을 한 권 꺼내어 잠시 숨을 돌리고 싶어졌다.

도서관 내부를 오르내리는 계단을 통해서도 바비칸 도서관이라는 활자가 있는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로비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또 한 번 이 공간이 형성하는 프레임에 의해 그림처럼 잘려 보였다.

이 바비칸에는 콘서트홀, 도서관, 인공 호수가 있는 정원과 온실, 그리고 여러 전시가 이뤄지는 갤러리 등 모든 것이 모여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살기 위해 지어진 곳이지만 문화시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브루탈리즘을 대표하는 건축 중 하나이기에 삭막함과 묵시록적 풍경을 먼저 상상하게 되지만 실제로 방문해 보니 모여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여 산다는 것의 의미

이곳은 르코르뷔지에가 직접 설계한 건물은 아니지만, 그가 제시한 현대적 집합주택의 이상인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의 개념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거주민을 위한 전용 공간과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도시 속의 작은 도시’, 거칠게 솟아오른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취향을 드러내는 다양한 식물들이 발코니 밖으로 자유롭게 뻗어 나온다. 복잡하게 얽힌 이 거대한 수직 도시는 널찍한 인공 호수와 내부 광장을 통해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그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모여 산다는 것이 반드시 삭막한 일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작은 수직 도시가 오직 특정 집단만의 폐쇄적인 사유지가 된다면 어떨까. 오로지 거대한 '거주 기계’로 기능하기 위해 계절과 시간의 변화마저 지워버린 매끄러운 입면으로만 올려진다면, 그것은 깨끗하고 안전한 유토피아의 탈을 쓴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J.G. 밸러드가 묘사했던 서늘한 공포처럼 말이다.

“얼마 전부터 그는 이 건물 자체에 점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콘크리트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이 건물 구석구석으로 흐르는 공기와 물의 힘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 J. G. 밸러드 , <하이-라이즈>,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2012

다행히도 현실의 바비칸은 소설 속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아트숍 근처의 작은 전시 공간에서 발견했다. 한쪽에 펼쳐진 낡은 신문 기사는 완공 전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격렬한 노동 쟁의, '바비칸 전투'를 기록하고 있었다. 과거의 뼈아픈 분쟁을 지워버리지 않고 기억하며 전시하는 태도. 어쩌면 그것이 이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숨을 쉬고, 꿈을 꾸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이야기가 흐르는 공간에서는 시간도 다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머무를 곳을 잃고 방황하는 정신이 지금 여기에 머무르도록 하는 존재의 처소가 될 수 있다.



박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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