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코프의 공식 임기는 2026년 8월부터 시작되지만, 파리 국립 오페라는 2월 오페라 가르니에(팔레 가르니에, Palais Garnier) 무대에 오른 <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uine)>공연의 지휘를 그에게 맡겼다. 섬세하면서도 명료한 그의 지휘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농밀한 낭만 드라마로 빚어내며, 푸시킨의 운문 소설이 지닌 정제된 우아함을 음악적으로 설득력 있게 펼쳐 보였다.

이번 <예브게니 오네긴>의 연출을 맡은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는 시간의 엇갈림 속에서 끝내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 그리고 어긋난 사랑의 궤적에 초점을 맞추며 작품을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냈다.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면서도 내면의 진동을 섬세하게 포착한 이번 무대는, 작품의 본질을 차분하고도 밀도 있게 드러낸 해석이라 할 만하다. 필자는 2026년 2월 15일 공연을 관람했다.
《예브게니 오네긴》, 러시아 문학사의 전환점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Alexandre Pouchkine)이 1823년부터 1831년에 걸쳐 집필하고 1833년에 발표한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문학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고전문학의 형식을 토대로 하면서도 러시아 고유의 정서와 현실을 섬세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당시 상류 사회에서 경시되던 러시아어의 표현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며 언어와 문화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우아한 형식미와 날카로운 사회 풍자, 서정성과 현실주의, 그리고 인간 내면의 방황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예브게니 오네긴》은,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로서 국경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은 권태에 사로잡힌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귀족 청년 오네긴을 중심으로, 순수하고 내성적인 타티아나, 낭만적 이상에 도취된 시인 렌스키, 그리고 사랑스러운 올가의 관계를 따라 전개된다. 시골 영지로 내려온 오네긴은 타티아나의 진실한 사랑 고백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장난스러운 행동으로 렌스키의 질투를 자극해 결국 비극적인 결투를 초래한다. 친구의 죽음 이후 죄책감과 허무 속에서 방황하던 오네긴은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타티아나와 재회하지만, 그녀는 이미 한 장군의 아내가 된 품위 있는 귀부인으로 변모해 있다.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오네긴의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타티아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사랑과 운명, 그리고 실존적 방황이 교차하는 인간의 한계를 깊은 여운 속에 남기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푸시킨의 운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iotr Ilitch Tchaikovski)는 영웅적 서사나 극적인 사건의 연쇄보다는 인간 내면에 생기는 미세한 균열과 후회의 정서를 음악으로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러시아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5인조와는 달리 ? 러시아 5인조는 러시아 클래식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글린카의 정신을 이어받아 러시아의 전통과 향토성을 계승하고자 했던 작곡가들의 모임으로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체자르 큐이(Cesar Cui), 모데스트 무소륵스키(Modest Mussorgsky),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Borodin)이 바로 그들이다 ? 서유럽 음악 전통에 충실한 음악 세계를 구축한 작곡가였다. 그는 푸시킨의 방대한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핵심 장면들을 선별해 대본과 음악으로 재구성했다. 푸시킨의 원작에서 중심인물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은 타티아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대본과 음악 모두에서 타티아나를 감정의 축이자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i>“나의 오페라에 화려한 무대 효과나 액션이 부족하다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푸시킨의 운문 소설에 매료되어 있으며, 여주인공 타티아나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바로 그 점이 나로 하여금 이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하게 만든다.”</i>
밀도 있는 캐릭터
이날 공연의 출연진은 극적 일관성과 심리적 설득력 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결혼제도를 거부하며 당대의 관습을 자극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오네긴은 자극적이고 냉소적인 캐릭터로 해석되기 쉽지만, 바리톤 보리스 핀카소비치(Boris Pinkhasovich)가 그려낸 오네긴은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한 서투른 인간에 가깝다. 무심한 듯 절제된 그의 연기는, 사실상 솔직한 감정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오네긴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했다.
작품의 정서적 구심점인 타티아나 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출신 소프라노 루잔 만타샨(Ruzan Mantashyan)의 안정된 가창과 우아한 무대 매너가 돋보였다. 유명한 ‘편지 장면’에서 보여준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의 분출과, 마지막 장면에서의 단호하고 절제된 태도는 한 인물이 겪는 내적 성숙의 과정을 설득력 있게 연결했다.

두 메조소프라노의 존재감 또한 인상적이었다. 순진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여성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마르빅 몽레알(Marvic Monreal)의 올가, 그리고 베테랑 성악가 수잔 그레이엄(Susan Graham)이 연기한 라리나 부인은 작품의 정서적 균형을 안정적으로 지탱했다.
이번 프로덕션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선사한 인물은 단연 보그단 볼코프(Bogdan Volkov)가 연기한 렌스키였다. 이상주의적 청년의 비극을 응축한 이 인물은, 오네긴과의 결투를 앞두고 부르는 아리아에서 삶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성찰을 절제된 서정 속에 담아내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특히 렌스키와 오네긴의 권총 결투 장면은, 푸시킨 역시 실제 결투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작품 외적인 기억까지 불러오는 묘한 이중의 감정 이입을 자아냈다.
오랜 경험의 축적에서 도출된 정제된 연출
이번 <예브게니 오네긴>의 연출을 맡은 영국 출신의 랄프 파인즈는 현대 오페라 연출계에서 심리적 리얼리즘과 절제된 미학으로 주목받아 온 인물이다. 연극과 음악을 백그라운드로 지닌 그는 오페라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르’가 아니라, ‘암시를 통해 내면을 드러내는 장르’로 접근한다. 화려한 장치나 극적인 효과 대신 시간의 흐름, 침묵, 시선의 방향과 같은 요소를 중시하는 그의 연출 언어는 인물의 감정을 과장 없이 포착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러한 미학은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특히 설득력을 발휘하며, 작품을 말해지지 않은 감정과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비극으로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그의 연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과감한 절제다. 러시아의 전원 풍경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최소한의 무대 장치와 상징적인 공간 구성을 통해 인물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와 시간의 간극을 시각화한다. 무대는 얼핏 보기엔 단순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그 여백은 곧 인물들이 끝내 건너지 못하는 감정의 간극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느리게 이어지는 장면 전환은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작품의 핵심 정서를 강화하며,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서로를 스칠 때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미 지나가 버린 가능성의 무게를 체감하게 한다.

랄프 파인즈가 <예브게니 오네긴>을 처음 접한 것은 드라마 스쿨 학생 시절의 연극 무대를 통해서였으며, 당시 그는 오네긴이라는 인물에 강하게 매료되었다고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경험은 그의 누이 마샤 파인즈(Martha Fiennes)가 1999년 연출한 영화 <오네긴>에 직접 출연해 주인공 오네긴을 연기했던 기억일 것이다. 이후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을 처음 접한 그는, 연극과 오페라라는 두 매체를 가로지르는 경험을 축적해 왔다. 이러한 오랜 ‘오네긴 체험’의 축적은, 오늘날 그가 오페라 연출가로서 차이콥스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파인즈는 자신의 첫 오페라 연출작인 이번 <예브게니 오네긴>을 통해, 연극과 달리 오페라에서는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대사가 아니라 음악이 주도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고, 그 역할을 음악 감독 세묜 비치코프에게 온전히 맡겼다. 비치코프의 지휘는 차이콥스키 특유의 서정성과 우울한 색채를 과장 없이 끌어낸다. 현악기의 깊고 어두운 음색은 인물들의 내면 독백처럼 흐르고, 목관의 섬세한 선율은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한다. 극적 효과를 앞세우기보다 성악과 호흡을 공유하는 그의 지휘는, 음악이 드라마를 감싸 안듯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감정선을 이끌어 가며 무대 전체에 균형과 긴장을 부여했다.

파리=박마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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