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 수트를 고집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바이블처럼 인용되는 표현이다. 돌고 도는 유행에 대한 우리의 길고 짧은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결국 경험해본 것 중에 ‘괜찮은’ 것으로 검증된 스타일은 다시 찾게 되니 틀린 말은 아니다.
100% 맞춤 수트를 ‘비스포크(Bespoke)’라고 하는데, 이 전문용어는 어느날부턴가 전자제품 라인업 중 하나로 활용되면서 익숙한 말이 됐다. 하지만 냉장고 도어를 내가 원하는 컬러로 조합하는 것은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비스포크는 아니다. 심지어 반맞춤 수트를 가리키는 ‘수미주라(su misura)’ 근처에도 못 간다.

냉장고가 비스포크가 되려면 구매자가 원하는 공간에 딱 맞는 사이즈에, 내부구조와 도어 모양과 색상, 개폐방식, 심지어 내부 색상, 본체와 도어의 연결 부자재까지도 구매자의 기호와 니즈에 딱 맞는, 세상에 하나뿐인 냉장고가 돼야 한다. 하지만, 이런 ‘몸값’ 높은 냉장고는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량생산 공정상 탄생하기 어렵다.
비스포크 수트의 세계적인 성지는 영국 런던의 ‘섀빌로(Saville Row)’다. 18세기부터 왕과 귀족들이 옷을 맞추던 테일러 샵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명성을 얻게 됐다. 헨리 풀(Henry Poole), 헌츠맨(Huntsman), 기브스 앤 호크스(Gieves & Hawkes), 앤더슨 앤 셰퍼드(Anderson & Sheppard) 등 손재주 좋은 테일러들이 잘 뽑은 수트를 일생에 한 번 입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든다.
이런 섀빌로는 ‘클래식(Classic)’과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18세기부터 이어진 섀빌로의 아성도 새로운 소비군인 MZ의 등장,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여타의 산업이 그랬듯 흔들렸다. 세계를 집어삼킨 전염병은 ‘격리사회’를 만들며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꿨는데, 그 가운데는 드레스코드에 대한 사회적 통념 파괴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무실 대신 집에서 일하고, 사람들과의 모임이 줄어드니 ‘빼입고’ 갈 자리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섀빌로에도 MZ 테일러들이 등장했고, 고객도 달라졌다. 귀족, 군 장교, 금융이나 법조계 전문직의 전유물이었던 비스포크 수트는 ‘계급의 옷’이란 이미지를 벗고 ‘취향의 옷’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MZ 테일러들은 실용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을 제안했고,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문만 열어두면 전세계에서 멋쟁이들이 몰려오던 ‘섀빌로 양복점’의 위엄을 뒤로 하고 문턱을 낮추며 하이엔드를 추구하는 패션, 예술,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들의 취향을 흡수했다.
유연한 사고를 지향하는 고객들에게 딱딱한 어깨, 긴 재킷 길이, 권위적인 실루엣은 어울리지 않는다. 테일러들은 어깨선은 부드럽게, 허리라인은 유연하게, 캐주얼의 경쾌함을 수트에 녹였다.
젊은 테일러들은 고객과의 소통 방식에도 변화를 꾀했다. 비스포크 작업과정을 소셜 미디어에 공개하면서 브랜드별 스토리텔링을 강화했다.
그 결과, 특별한 계층만이 향유하던 ‘비밀스러운 살롱문화’ 로 인식되던 비스포크 테일러 샵은 흥미로운 장인문화 공간으로 보다 가까워졌다.
실제로 섀빌로에서 수트를 맞춘 지인에 따르면, 첫 채촌(몸의 치수를 재는 과정) 이후 중간 가봉을 위해 다시 섀빌로에 가야했고, 완성된 옷을 찾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같은 긴 기다림은 명품의 가치를 소유하려는 사람들 사이에선 인고의 고통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섀빌로 테일러들은 고객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해외 출장 피팅을 위한 트렁크쇼까지 한다는 후문이다.
몇 일 전 대한민국 비스포크 테일러 샵의 대명사랄 수 있는 J 사에 들렀다. 오래 전 故이병철 삼성 선대회장의 옷을 맞추던 일개 부서에서 태동한 J사는 올해 말 창립 70주년을 바라보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서도 내로라하는 테일러 샵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득 2026년 현재 비스포크 클래식에 대한 J사의 재해석이 궁금했다.
“J는 이제 비스포크 수트를 넘어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어요. 저희가 정장만 맞추는 줄 알고 계시죠? 패딩점퍼도 맞추고 심지어 잠옷도 맞춰요.(웃음) 이게 다 고객층이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인데, MZ 고객들은 자신만을 위한 아이템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고 적극적이에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하며 비스포크 클래식이 어떤 새로운 스타일과도 잘 융합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J사 CEO의 설명이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아이템을 갖기 원하는 MZ 비스포크 마니아들은 J사 수트 장인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험(?)에 들게 했고, 그 결과 J사의 라인업은 다채로워지며 진화 중이라는 설명이다. 그 근간에는 적극적인 고객과의 소통이 있었다.
섀빌로와 J사의 역사 각각 200년과 70년. 이들이 전통만을 ‘정답’이라고 고집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역사다. 브랜드의 코어는 중요하고, 헤리티지의 무게감은 브랜드의 가치와 가격에 반영된다.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고객은 변한다. 닿을 듯 말 듯 쫄깃쫄깃한 고객과의 거리재기를 얼마나 섬세하게, 트렌드 변화에 대한 완급조절을 얼마나 세련되게 하느냐에 따라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은 결정된다.
사랑이 변하듯 고객은 변한다. 사랑이 움직이듯 브랜드도 움직인다, 때론 느슨하게 때론 팽팽하게.
장헌주 님은 홈쇼핑TV 마케터로 재직 중 도미(渡美), 광고 공부를 마친 후 중앙일보(LA) 및 한국경제매거진 등에서 본캐인 기자와 부캐인 카피라이터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딜로이트 코리아에 이어 IT기업 커뮤니케이션 총괄 디렉터를 역임한 후 지금은 크리에이티브 솔루션 랩 '2kg'에서 PR & 위기관리, 브랜딩 전문가로 세상의 일에 '시선'을 더하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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