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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가 복원한 한 예술가의 삶…미술사를 바꾼 비평가 로저 프라이

입력 2026-03-05 15:44   수정 2026-03-05 16:56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타인의 삶은 대개 단편적인 인상이나 화려한 업적의 파편으로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 버지니아 울프가 집필한 평전 <로저 프라이>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한 인간의 입체적인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한 기록이다. 울프의 첫 평전이자 생전 마지막 출간작인 이 책은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바꾼 비평가 로저 프라이(1866~1934)를 향한 지적인 작별 인사다.

로저 프라이는 1866년 영국의 엄격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자녀들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과학의 길’을 걷길 바랐고, 실제로 프라이는 학창 시절 과학에 두각을 나타내며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만남이 그의 인생 궤적을 바꿨다.

그는 페르시아 타일이나 렘브란트의 원작을 보여주며 지적 자극을 주던 교수에게 매료돼, 자신의 진정한 소질이 과학이 아닌 예술에 있음을 깨닫는다. “얼마나 실망하실지 알지만, 이것이 제가 진정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에게 보낸 이 편지는 평생에 걸친 갈등의 시작이자, 위대한 비평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프라이의 이름 뒤에는 항상 ‘후기 인상주의의 창시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910년, 그는 세잔, 마티스, 반 고흐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화가들을 모아 ‘마네와 후기 인상파’ 전시를 개최했다. 대중과 평단의 반응은 냉혹했다. “일고여덟 살 어린애 수준의 낙서”라는 조롱이 쏟아졌고, 프라이는 순식간에 ‘믿을 수 없이 경박하고 머리가 살짝 돈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다. 울프는 프라이가 비난 섞인 기사를 읽으면서도 자신의 미학적 확신을 굽히지 않았던 순간들을 수천 통의 편지를 통해 세밀하게 복원한다. 결국 역사가 증명하듯 그의 안목은 현대 미술의 표준이 됐다. “당대의 기호가 한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그 변화는 로저 프라이가 이끈 것”이라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울프는 프라이를 단순한 위인으로 박제하지 않는다. 평전 속 프라이는 찬란한 빛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대중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따뜻한 성품을 지닌 ‘만인의 친구’였지만, 일터에서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무섭게 밀어붙이는 ‘독선적인 외골수’이기도 했다. 심지어 그와 일했던 동료 중 한 명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무솔리니나 히틀러가 죽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는 극단적인 회고를 남길 정도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화가로서의 열등감이다. 비평가로서는 세계적인 권위자였지만, 정작 본인이 가장 사랑했던 ‘그림 그리는 일’에서는 평생 재능의 한계를 느끼며 괴로워했다.

이처럼 입체적인 인물상이 가능한 배경엔 두 사람의 관계가 있다. 울프와 프라이는 20세기 초 영국 지식인 모임인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오랫동안 교류했다. 울프는 생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삶의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은 로저 프라이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울프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그와 관련된 모든 기록과 지인들의 증언을 샅샅이 파헤쳤다. 고통스러운 집필 과정이었으나, 이는 친구를 온전히 기억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무였다. 딱딱한 미술사가 어렵게 느껴졌던 독자라도 울프의 유려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로저 프라이라는 뜨거운 삶의 궤적을 만나게 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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