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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민주·해외개척… 지평의 남다른 26년 성장법 [로펌의 역사]

입력 2026-03-08 09:00  

2000년대 초반 주요 법무법인의 합병으로 본격화된 국내 대형 로펌 시대가 25년을 맞았습니다. 개인 송사 중심에서 기업자문, M&A, 경영권 분쟁, TMT 등 전문·세분화된 법률 서비스 체계로 전환되며, 대형 로펌들은 한국 경제 성장의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주요 로펌의 탄생부터 성장기까지의 역사를 조명하며, 대한민국 리걸 마켓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망합니다.

"일을 최고로 잘하는, 민주적이고 윤리적이며 공익적인 로펌을 만들자."

2000년 4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10여 명의 젊은 법률전문가들이 작은 사무실에 모여 이 한 문장을 창립 철학으로 공유했다. 이름은 지평법률사무소. 주변의 시선은 냉소적이었다. 김앤장·광장·태평양이 이미 시장을 분점한 상황에서 신생 로펌이 살아남을 자리가 있겠느냐는 우려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지평은 전문가 400여 명, 8개국 9개 해외사무소, 연 매출 1327억원(2025년 국세청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의 대형 로펌으로 성장했다. 몸집 불리기 경쟁에 뛰어드는 대신 해외 시장 선점, 민주적 운영, 공익 활동 의무화 같은 원칙들을 실제 경쟁력으로 전환해 온 결과였다. 빠른 길은 아니었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었다.
강금실과 10명의 결의


창립 주축은 양영태 대표변호사(사법연수원 24기)를 중심으로 김상준(25기), 임성택(27기), 배성진(28기) 변호사 등이었다. 이들이 기성 로펌을 떠나 새 판을 짠 데는 공통된 불만이 있었다. 능력 있는 변호사가 성과를 내도 기득권 구조 안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환경, 공익보다 수익을 앞세우는 조직 문화였다.

여기에 강금실 변호사(13기)가 뜻을 같이하며 합류했다. 여성 최초 로펌 대표변호사라는 상징성은 설립 초기 지평의 이름을 법조계에 각인시켰다. 그는 2003년 노무현 정부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지평으로 돌아왔다. 강금실이 심어 놓은 공익·윤리의 씨앗은 지평 DNA의 일부가 됐다.

설립 당일부터 공익위원회를 구성하고 변호사 공익활동 의무제를 도입한 것은 그 철학의 즉각적인 발현이었다. 대형 로펌이 공익 활동을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던 시절, 지평은 이를 조직의 작동 원리로 내면화했다.
공채 1기가 로펌의 미래를 바꾸다

창립 이듬해인 2001년, 지평은 공채 1기를 선발했다. 그중에 24년 뒤 공동집행대표로 취임한 두 사람이 있었다. 김지홍(27기)과 이행규(28기) 변호사다. 이들은 더 크고 처우가 좋은 다른 로펌의 제안을 물리치고 지평을 택했다. 전문성과 윤리성, 공익성을 함께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지평 성장 모델의 핵심이었다. 창립 세대의 가치에 공감한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유입되고, 조직 안에서 성장하며, 다시 조직을 이끄는 선순환이 지평의 성장을 이루고 있다.

초기 성장세는 두드러졌다. 창립 당시 한국변호사 11명이었던 규모는 2004년 35명, 2006년 43명으로 빠르게 불어났다. 2005년에는 설립 5년 만에 당시 국내 M&A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3조 4000억원의 하이트맥주 진로 인수를 자문하며 업계의 눈길을 끌었다. 2006년 영국 법률전문지 '아시아로(Asia Law)'가 지평을 송무 부문 2위로 선정했다. 이름을 알린 지 불과 6년 만이었다.
아시아를 향한 먼저 간 발걸음

지평이 기성 대형 로펌과 가장 선명하게 달랐던 지점 중 하나는 해외를 향한 시선의 방향이었다. 당시 국내 로펌의 해외 관심사는 뉴욕·런던이었다. 영미 명문 로스쿨 유학, 글로벌 로펌과의 네트워크 구축이 해외 업무의 전형적인 경로였다.

양영태 대표는 달랐다. 그는 베트남으로 직접 장기연수를 떠났다. 영미권이 아닌 아시아 신흥시장을 현장에서 배우겠다는 결단이었다. 그 결실로 2007년 베트남 호찌민과 중국 상해에 사무소를 열었다. 이후 캄보디아(2009), 라오스(2009), 인도네시아(2012), 미얀마(2012), 러시아 모스크바(2015)로 이어진 사무소 개설은 국내 로펌의 해외 진출 지도를 새로 그리는 작업이었다.

해외 사무소가 늘어나면서 외국변호사 수도 빠르게 불어났다. 설립 당시 2명에 불과했던 외국변호사는 합병 직후인 2008년 13명, 해외 사무소 확장이 본격화된 2015년 31명을 거쳐 2025년에는 54명으로 늘었다. 현지 밀착형 서비스를 위해 각국 법률 전문가를 직접 키워온 결과였다.

영미권 로펌이 즐비한 홍콩·싱가포르가 아니라 아세안 신흥국과 구소련권을 선점한 이 전략은, 후발주자의 정공법 대신 비어 있는 시장을 먼저 채우는 우회로였다. 훗날 이것이 크로스보더 딜에서 지평만의 경쟁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지성과의 합병, 판을 바꾼 한 수

2008년 5월22일, 리츠칼튼 호텔에서 법조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행사가 열렸다. 법무법인 지평과 법무법인 지성의 합병 조인식이었다. 같은 해 9월 출범한 '법무법인 지평지성'은 한국변호사 104명, 외국변호사 21명 등 총 125명의 변호사를 거느린 7번째 대형 로펌으로 올라섰다.

전략적 계산은 명확했다. M&A와 노동 자문이 강한 지성, 대형 M&A 실전 경험과 탄탄한 소송팀을 보유한 지평의 결합은 노동 이슈가 복잡하게 얽힌 공기업 민영화나 대형 M&A라는 틈새를 정확히 겨냥했다. 금융 전문 인력도 30명 이상으로 늘며 금융자문 역량이 한층 강화됐다. 2014년에는 사명을 다시 '법무법인 지평'으로 단순화했다. 복잡한 이름보다 단단한 브랜드를 택했다.

이공현·김지형·김석동, 명망가 영입이 완성한 종합 로펌

2010년대 초반, 지평은 '젊고 패기 있는 로펌'에서 '무게 있는 종합 로펌'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을 맞는다. 2012년 이공현 전 헌법재판관을 시작으로 김지형 전 대법관,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법조·금융계 거물급 인사들이 잇따라 지평에 합류했다.

이 중 가장 파급력이 컸던 것은 김지형 전 대법관의 합류였다. 당시 3~4명에 불과했던 노동팀은 이를 계기로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기 시작했고, 이후 40여 명 규모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서울고법 노동전담 재판장 출신인 윤성원 대표변호사, 공인노무사 겸 변호사로 현장 실무에 정통한 권영환 그룹장 등이 포진하며 업계 최고 수준의 노동 자문 역량을 갖추게 됐다.

명망가 영입과 함께 지평의 공익 철학도 한층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 나갔다. 2014년 9월, 지평은 공익 사단법인 두루를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은 김 전 대법관이 맡았다. 창립 당시부터 공익위원회를 운영하며 변호사 개인의 공익활동을 독려해 왔지만, 이를 전업으로 수행하는 독립 법인을 만든 것은 차원이 달랐다. 두루는 사회변화를 위한 제도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공익법단체로, 현재 10명의 상근 공익변호사가 장애인 인권, 아동·청소년 인권, 국제인권, 환경 등의 분야에서 공익소송과 자문,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퀄컴 10년 소송과 1000억원의 문턱

2016년 국세청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 매출 459억원에서 2017년 571억원, 2018년 599억원, 2019년 742억원, 2020년 879억원.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이 이어졌다. 그리고 2021년, 연 매출 1051억원을 기록하며 '1000억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설립 21년 만이었다.



이 시기 성장의 상징은 퀄컴 사건이었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가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행위에 1조원대 과징금을 부과하자 퀄컴이 불복 소송을 제기했다. 지평은 10년 넘게 공정위를 대리해 이 법정 공방을 최종 승소로 이끌었다. 공정거래 분야를 진두지휘한 김지홍 변호사는 2020년 대형 로펌 변호사 최초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같은 해인 2020년, 지평은 두 개의 굵직한 카드를 추가로 꺼냈다. 부동산 실물거래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던 법무법인 넥서스의 부동산·리츠 전문 변호사 12명을 대거 영입한 것, 그리고 국내 로펌 최초로 ESG센터를 설립한 것이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자문이라는 신시장을 선점한 ESG센터는 이후 SK그룹·현대차그룹·포스코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의 인권실사 컨설팅을 연달아 수주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랜드센트럴 이전, 그리고 부다페스트까지


2022년 2월, 지평은 서대문 KT&G타워를 떠나 남대문 그랜드센트럴 빌딩으로 본사를 옮겼다. 400~500명 규모의 대형 로펌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공간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후 성장세는 꾸준했다. 2022년 1101억원, 2023년 1158억원, 2024년 1206억원, 2025년 1327억원. 2021년의 첫 1000억 돌파가 일시적 성과가 아니라 구조적 성장임을 숫자가 증명했다. 2025년 매출은 2016년(459억원)의 약 2.9배다.

성장의 외형뿐 아니라 내실도 채워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시기다. 대한민국 베스트 로이어 수상자 중 지평 소속 변호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입법자문 분야의 김진권 변호사(변호사시험 2회), 공정거래 분야의 장품 변호사(39기), 국제분쟁·중재 분야의 김진희 외국변호사, 형사·수사기관 대응 분야의 김선국 변호사(변시 2회)가 대표적이다.

2024년 10월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무소를 열었다. 한국 로펌 최초였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동유럽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을 현장에서 지원하고,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자문 시장을 선점하려는 포석이었다. 현재 지평은 8개국 9개 해외사무소로 국내 로펌 중 가장 넓은 해외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같은 해 특허법인 지평도 설립했다. "로펌의 경쟁력은 이제 기술 전문성에서 갈릴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지식재산권 분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세대 승계, 공채 1기가 전면에 서다


2025년 1월 1일, 창립 세대로부터 공채 1기인 김지홍·이행규 변호사로의 경영권 이양이 이뤄졌다. 여기에 2004~2005년 입사한 정원(30기)·정철(31기) 변호사가 나란히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두 대표는 이것을 '세대교체'가 아닌 '세대 승계'라고 불렀다. 선배 경영진이 쌓아온 노동·해외·소송 역량 위에, 공정거래와 자본시장이라는 기둥을 더하겠다는 의미다.

선출 방식부터 지평다웠다. 미래혁신위원회가 파트너 공모, 서면 질의응답, 파트너 간담회 등의 절차를 거쳐 두 대표를 추대했다. 창립 때부터 강조해 온 민주적 운영 원칙이 25년 뒤 대표 선출에도 관철된 것이다.

김지홍 대표는 퀄컴 사건으로 이름을 알린 공정거래 전문가다. 이행규 대표는 기업공개(IPO)와 자본시장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쌓아온 인물로, 외국기업의 국내 상장을 위한 SPC 방식을 금융당국에 처음 제안해 제도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경마켓인사이트 IPO 법률자문 순위에서 2019~2021년 3년 연속, 2023년에도 한국 로펌 1위를 기록했다.

정철 변호사는 미중 패권 경쟁, 지정학적 갈등, 인공지능 등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 기업이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2025년 9월 '글로벌 리스크 대응 센터'를 출범시키고 센터장을 맡았다. 정원 변호사는 2026년 3월 건설·부동산 부문대표로 선임돼 건설, 리츠, 부동산금융, 정비사업, 도심복합개발을 아우르는 통합 조직을 총괄하게 됐다.

새 집행부가 내건 비전은 'Legal & Beyond'. 법률의 경계를 넘어 정치·경제·글로벌 규제환경까지 아우르는 통합 솔루션이다.

이들은 "소송과 자문을 나누고, 민법·공정거래법·세법으로 분야를 나눠 자문하는 시대는 끝났다"며 "고객이 직면한 문제에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동반자 로펌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빅5'를 향한 선언, 그 앞에 놓인 현실

새 집행부는 취임 일성으로 "향후 10년 내 빅5 진입"을 목표로 내걸었다. 지평이 걸어온 25년의 궤적을 보면 허언이라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 목표 앞에 놓인 벽도 그만큼 뚜렷하다.

2025년 매출 기준으로 김앤장은 추산 1조6000억원 안팎, 태평양·세종·광장·율촌도 일제히 '4000억' 클럽을 달성했다. 지평의 1327억원은 이들과 서너 배의 간격이다. 그 사이 화우(2812억원), 와이케이(1694억원)와의 경쟁도 넘어야 한다. 변호사 수에서도 빅5와의 격차는 수백 명에 이른다. 단기간에 좁히기 어려운 구조적 차이다. 여기에 중대형 로펌업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지평이 자리한 포지션을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경쟁자들도 생기고 있다.

경영 컨설팅과 법률 자문의 융합이라는 'Legal & Beyond' 비전도 아직은 검증 단계다. 비 변호사 전문가를 파트너 반열에 올리는 문화적 전환이 얼마나 빠르게 자리 잡을지는 미지수다. 지평이 25년간 원칙을 경쟁력으로 전환해 온 저력은 분명하다. 그 저력이 빅5의 벽 앞에서도 통할지, 지금부터가 진짜 시험대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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