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에 걸린 이것들은 코끼리다. 물론 누구도 섣불리 믿지 않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이모저모 뜯어봐도 지금껏 봐왔던 그 커다란 동물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어서다. 흰 보풀이 일어난 울 태피스트리의 질감, 구불구불 휘어진 곡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부피감이 전부다. 보는 것만으로는 이것이 코끼리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선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는 엄정순의 개인전 ‘보푸라기- 촉각적 시선’에는 해체된 코끼리 조각 8개가 걸려 있다. ‘코끼리의 어느 모서리’ 연작이다.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어도 관람객에겐 큰 덩어리일 뿐이다. 만약 코끼리 몸 구석구석을 만져본 ‘촉각적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파편을 만지는 순간 “이것은 코끼리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 순간 불교 <열반경>의 ‘맹인모상(盲人摸象·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가 뒤집힌다. 눈먼 장님들이 코끼리 일부만 만지고선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어리석음을 꼬집는 우화에서 ‘눈뜬 자들의 눈멂’까지 질타하는 비유로 탈바꿈한다. 그간 우리가 인식해온 대부분은 머릿속에 박제된 시각적 관념을 주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코끼리는 ‘눈으로만 볼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우리는 본 게 많아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살면서 시각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요. 여러 감각이 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아까워요. 눈으로만 판단하면 편견에 갇히기 쉽지만, 시각 정보가 적으면 더 깊이 탐색해요. 감각의 싸움에서 진 겁니다.”
엄정순은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감각을 확장하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부터 맹학교 미술교육 등 시각장애인들과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미술을 감상하는 방식을 새롭게 탐구해 왔다. 이런 그의 작업세계를 대표하는 핵심요소가 보푸라기다. 반복된 접촉과 마찰로 우연하게 생성되는 잔여물인 보푸라기처럼 작품과 신체가 만나며 생기는 색다른 감각에 주목한 것이다.
전시를 관통하는 작품은 ‘50만명의 체온으로 빚어낸 무늬 없는 리듬’이란 글귀가 쓰인 회화 연작인 ‘무늬 없는 리듬’이다. 2023년 ‘제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설치작업 ‘코 없는 코끼리’를 잇는 작업이다. 천, 양모, 철판으로 제작된 코끼리 조각은 당시 관객의 신체적 접촉을 전제로 한 촉각 중심의 설치물이었다. 당시 약 50만 명이 작품을 만지면서 표면에 일어난 보푸라기를 수거해 화면에 옮겼다. 촉각으로 감상한 흔적이 예술 재료로 재탄생한 것이다.

예술과 관계 맺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오직 시각에만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전시장 내부 설치 작업 ‘찰나 2001-1’도 눈길을 끈다. 1000권이 넘는 점자책을 벽면에 가득 채웠다. 불어오는 바람으로 저마다 다른 페이지가 펼쳐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가운데 놓인 점자 아트북 ‘흑연으로 쓴 코끼리-기록되지 않은 도서관’은 시력을 거의 잃은 노년에 국립도서관장이 된 라틴아메리카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림을 보거나 책을 읽는 감상 행위가 반드시 눈으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뜻이 담겼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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