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위기에 처한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첫 구조 개편안인 ‘대산 1호 프로젝트’가 정부 승인을 받았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각각 6000억원을 출자해 재무 개선에 나서고, 정부는 금융 지원을 포함한 2조1000억원 규모 지원 패키지를 가동하기로 했다. -2026년 2월 26일자 한국경제신문-
지난해 8월 정부 주도로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방안이 논의된 지 약 반년 만에 첫 통폐합 사례가 나왔습니다. 충남 서산에 있는 롯데케미칼의 대산 사업장을 별도 법인으로 분리한 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이 만든 합작사와 합병하는 것인데요, 이 과정에서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에틸렌을 생산하는 연산 110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공급이 넘쳐나는 에틸렌 생산을 스스로 줄여 공급과잉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그 대신 합작사를 통해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현재 1470만 톤 규모인 국내 NCC 중 370만 톤을 줄이기로 한 구조 조정안의 일환입니다. 기업들이 스스로 자기 살을 잘라내는 구조조정에 나서면 정부가 대규모 대출 등 자금 지원과 취득세·법인세 감면 등 세제 혜택, 특구 지정을 통한 전기료 감면 등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입니다.
이번 구조조정은 지난 50년간 이어진 한국 석유화학 역사상 처음 있는 대규모 생산능력 감축 결정으로 꼽힙니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 위기론은 중국의 대규모 증설과 글로벌 경기침체가 맞물린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불거졌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이 “공급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생산량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내에서 NCC를 가동하는 9개 기업은 2024년 1조4000억원, 작년엔 3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이미 2022년부터 NCC 가동률은 손익분기점인 85%를 밑도는 74~81%, 원료가 되는 납사와 거기서 나오는 에틸렌의 가격차인 스프레드는 톤당 200~220달러로 수익을 내기 위한 최저점인 250달러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오랫동안 생산량을 줄이지 못한 것이지요. 경제학에선 이를 게임이론으로 분석합니다.
게임이론은 자신의 결과가 상대방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전략적 상황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최선 전략을 선택하는지 분석하는 수학적 이론입니다. 석유화학 산업은 이 가운데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수의 딜레마는 각 주체가 협력하면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오지만,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하다 보면 결국 모두 손해를 보는 상황을 말합니다. 석유화학 기업들의 상황을 단순화해봅시다. 시장에 제품이 너무 많이 공급되면 가격이 떨어지고 기업 이익도 줄어듭니다. 따라서 모든 기업이 생산량을 조금씩 줄이면 가격이 올라 산업 전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의 입장은 다릅니다. 경쟁사가 생산을 줄일 때 자신만 생산을 유지하면 오른 가격에 수익성은 높아지고 시장점유율도 늘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먼저 감산하면 매출이 줄고 경쟁사에 고객을 빼앗길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각 기업의 ‘합리적 선택’은 생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기업이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공급과잉이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개별 기업의 최적 선택이 산업 전체로선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경제학에선 죄수의 딜레마를 깨는 해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반복 게임(repeated game)’입니다. 한 번만 경쟁하는 관계에서는 배신이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 계속 만나는 관계라면 협력이 더 큰 이익을 줍니다. 그렇기에 산업 내 신뢰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둘째, ‘신뢰할 수 있는 규칙(rule setting)’입니다. 감산 기준이나 구조조정 원칙이 명확하면 기업은 경쟁사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셋째, 외부 조정자(coordinator)의 등장입니다. 시장 참여자들만으로 해결이 어려울 때 중립적 주체가 조정을 맡는 것입니다.
이번 ‘대산 1호 프로젝트’가 의미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업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먼저 생산을 줄이지 않지만, 공통의 기준과 안전장치가 마련되면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정부는 구조조정을 개별 기업의 자발적 결단에만 맡겨두는 대신 구조조정의 원칙을 세우고, 충실히 이행할 경우 금융지원과 세제 혜택이라는 보상을 제시했습니다. 감산에 따른 손실을 줄여주며 협력의 유인을 만들어주는 조정자 역할을 수행한 것이지요.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경쟁 중심의 게임에서 협력 가능한 게임으로 전환하는 첫 단계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앞으로 추가 감산과 사업 재편이 실제 성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최소한 ‘모두가 알고도 움직이지 못했던’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험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산업의 생존은 개별 기업의 선택을 넘어 시장과 정부, 제도가 어떻게 협력하고 균형을 이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NIE 포인트
1. 석유화학 기업들이 공급과잉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를 알아보자.2. 석유화학 산업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해보자.
3.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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