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영화 촬영 현장은 거대한 배에 비유된다.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스태프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감독은 그 배의 선장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강한 위계가 작동하는 환경에서는 작은 실수에도 고성이 오가거나 긴장감이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영화계에서는 “촬영장은 전쟁터”라는 표현이 관행처럼 쓰여 왔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이러한 관행을 바꾸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라는 작업 자체가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화를 내며 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촬영을 시작하기 전 핵심 스태프들을 따로 불러 모아 한 가지 약속을 제안했다. 촬영 현장에서는 서로에게 화를 내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창작 환경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원칙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조직행동학에서 말하는 ‘심리적 안전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개념은 하버드경영대학원의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가 제시한 것으로, 구성원이 질문을 하거나 실수를 인정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조직 내에서 이러한 안전감이 형성될 때 사람들은 침묵 대신 발언을 선택하고 방어 대신 협력을 선택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심리적 안전감이 단지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글이 진행한 조직 연구 프로젝트인 ‘Project Aristotle’서도 가장 성과가 높은 팀의 핵심 요인으로 ‘심리적 안전감’이 꼽혔다.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실수를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팀의 창의성과 문제 해결력을 높인다는 결론이었다.
장항준 감독의 촬영 현장에서도 비슷했다. 한 촬영에서 중요한 감정 장면을 준비하던 중, 연출부의 막내 스태프가 조심스럽게 소품을 활용한 연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위계적 환경이라면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 제안을 흥미롭게 받아들였고, 기존에 준비한 콘티를 수정해 장면을 다시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그 장면은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완성됐다.
이 장면이 시사하는 점은 리더가 모든 답을 알 수도,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막내 스태프라도 자신의 생각이 실제 결과물에 반영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면 조직 구성원은 단순한 실행자가 아니라 창작 과정의 주체로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금전적 보상 이상의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실제로 배우 유해진 역시 인터뷰에서 장 감독의 작업 방식을 언급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다. 감독이 지나치게 날카롭거나 권위적으로 행동하면 배우와 스태프가 위축되어 새로운 시도가 나오기 어렵지만 장 감독은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마음껏 이야기해 달라”고 독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어차피 감독이니까 사람들이 다 내가 한 줄 알 것”이라고 말하며 아이디어를 편하게 꺼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한다.
그의 삶의 태도 역시 이러한 리더십과 무관하지 않다. 주변에서는 종종 “윤종신이 임시보호하고 김은희 작가가 입양했다”는 농담이 돌 정도로 장항준 감독은 특유의 유쾌한 처세술과 인간적인 매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일 자체를 즐기며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긴장과 스트레스 대신 농담과 여유로 분위기를 풀어가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러한 태도는 촬영 현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권위로 사람을 압박하기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리더십의 중요한 역설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가볍고 느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의 창의성과 몰입도를 높이는 강력한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리더들이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지나친 긴장은 사람들의 생각을 위축시키고 안전한 선택만 하도록 만든다. 반대로 심리적 안전감이 확보된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조직이 창의성과 협업을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구성원들이 마음 놓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환경은 여전히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장항준 감독의 사례는 리더가 만들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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